나쁜 딸내미
나쁜 딸내미
며칠 전부터 찾아온 차가운 겨울 날씨가 물러가기 싫었던지 아침 일찍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더니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하늘에서 하얀 눈가루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비록 많은 양의 눈은 내리지 않고 또 땅바닥에 닿자마자 바로 녹아버리는 하얀 눈이지만“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하얀 눈이 내리려고 날씨가 추워지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니 날씨가 추워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오늘도 빨간 오토바이에 우편물을 싣고 천천히 달려 온 곳은 전남 보성읍 용문리 만평마을입니다.
그리고 만평마을의 가운데 쯤에 살고계시는 할머니께 소포를 배달하려고 초코파이 상자 절반쯤 되는 크기의 조그만 소포 하나를 가지고 할머니 댁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자 할머니께서는 마루에서 커다란 쌀자루에 담겨있는 쌀을 바가지로 조금씩 덜어 작은 자루에 옮겨 담고 계십니다. “할머니! 날씨가 추운데 무엇하고 계세요?”“응! 우리 딸한테 쌀 좀 보내줄라고 푸대에 담고 있어! 그란디 우리 집에 무슨 반가운 것이 왔으까?”“예 소포가 하나 왔는데요!”“이~잉! 우리 딸이 보낸 것 인갑구만!”
“무엇을 보낸다고 하던가요?”“내가 파스가 없으문 못살아! 그란디 여그하고 서울하고 파스 값이 영 틀리데! 서울 약국에서 파스를 사문 여그 보다 더 싸다고 우리 딸이‘내가 사서 보내 주껏잉께 여그서 사지 말고 기달리고 있으소!’그래서 기달리고 있었는디 오늘 왔는 갑구만!”“할머니! 그럼 여기에 지장 한번 찍어주실래요!”“지장 찍어주라고? 그래~에!”하시더니 제가 가지고 다니던 인주를 내놓자 엄지손가락을 인주에 쿡 눌러 묻히시더니 “으따가 지장을 찍으라고?”
“할머니! 인주를 조그만 묻히시지 그렇게 손가락에 인주를 많이 묻히시면 손가락을 어떻게 닦으려고 그러세요?”“아따~아! 꺽정도 말어! 별 꺽정을 다 해쌋네!”“그란디 으따 지장을 찍으라고 잉!”하시며 무엇이 그리 급하신지 자꾸 재촉을 하십니다.“할머니! 무엇이 그리 급하세요? 누가 쫓아오나요?”“아! 찍어줄 것은 얼렁 찍어 줘야제! 날도 춥고 아저씨도 바쁘껏인디 안 그래?”“할머니! 여기에 지장을 찍으시면 되요!”“여그다 찍으라고? 알았어!”하시며 우편물 수령증에 지장을 가만히 찍으시더니
“아이고! 인지밥을 쪼그만 묻히껏인디 무단히 많이 묻혔네!” 하시며 빙그레 웃으십니다. “할머니! 그런데 따님이 어디에 살고 계시는데 쌀을 보내드리려고 그러세요?”“금방 약 보내준 딸이 서울서 산디 쌀이 읍다고 그래서 내가 쪼깐 보내줄라고 그란디 그것도 영 성가시네!” “할머니! 서울에는 쌀이 없다고 그러던가요?”“아따~아! 아! 서울에 으째 쌀이 없간디! 쌀이사 있제만 내가 보내준 쌀하고 거그서 산 쌀하고 같것어? 그래도 내가 농사지어서 보내준 쌀인디 이 쌀은 다르제!”
“할머니 그럼 쌀자루 이리 줘 보세요!”하고는 큰 쌀자루를 들어 조그만 쌀자루에 나누어 부어 조그만 쌀자루 네 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일론 끈으로 묶은 다음“할머니! 따님이 쌀을 받아보면 무지 좋아하겠네요?”하였더니 할머니께서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면서“아이고! 딸내미들은 다 나뻐!”“예~에? 아니 할머니! 왜? 딸내미들이 다 나빠요? 이렇게 파스도 사서 보내드리는데!”“그래도 자꼬 이런 것을 보내 줄랑께 성가신디! 그랑께 나쁘제 어채!”
“에이! 할머니 속마음은 안 그렇지요? 자꾸 따님에게 무엇이든 더 주고 싶지요? 안 그래요?”“금메 그라기는 그라제~에! 인자 나도 나이가 많은께 농사를 지문 을마나 지껏이여? 그래도 내손으로 농사를 짓고 그랑께 이라고 쌀이라도 보내주고 그라제 내손으로 농사를 못 짓고 그라문 보내주고 싶어도 못 보내주제! 아이고! 내가 뭣을 하니라고 이라고 나이만 많이 들었는가 몰르것네!”“그래도 할머니는 아직까지 정정하시잖아요! 옆 집 할아버지는 거동도 못하시던데요! 아직까지 정정하신 것도 큰 복이에요! 아시겠어요?”
“금메! 그라기는 그란디 애기들 한테 뭣을 보내주고 나문 내가 내년에도 또 이른 것을 보내줄 수 있으까? 그런 생각을 하문 영 맘이 안 좋단께!”“할머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직은 건강하시니까 내년에 또 농사를 지으면 되지요! 안녕히 계세요!”하고 할머니 댁을 나왔습니다. 당신이 직접 그 힘든 농사를 짓고 또 그것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건강 때문에 내년에 또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걱정하시는 할머니의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모든 부모님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 한 편이 뭉클해져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