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 호박 한 개
풋 호박 한개
아침부터 잔뜩 흐려있던 날씨가 제가 출근할 무렵부터는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가 우체국 사무실에 도착하였을 무렵부터는 눈과 비가 섞인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오늘이 봄으로 가는 길목인 우수(雨水)인데 날씨가 다시 겨울로 돌아가려는 것인가?”하는 생각을 하다 “강원도 쪽에 70cm 가 넘는 엄청난 눈이 내렸다는데 여기는 진눈깨비가 내려 다행이다! 강원도 쪽에 우편물 배달하는 집배원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강원도 쪽에 비하면 그래도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지어봅니다. 오전 9시경 우체국 창구에 오늘아침에 접수되어 배달할 우편물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우체국 창구로 가 보았더니 평소와 달리 우체국 창구는 아주 한산한 편입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씨 때문에 여느 때와 달리 손님들이 거의 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체국 창구 한쪽 의자에 보성읍 봉산리 노산마을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 한분이 앉아계십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도 추운데 일찍 나오셨네요!”
“우메! 아저씨가 통 안보이드만 우체국에 온께 얼굴을 보것네~에! 그동안 잘 계셨제~에? 설이랑 잘 쇠시고~잉?”하고 할머니께서는 활짝 웃는 얼굴로 저를 반기십니다. “할머니! 우체국에는 무슨 일보러 나오셨어요?” “우체국에 볼일 있는 것이 아니고 으디를 좀 갖다 온디 하다 추워서 쪼금 쉬어갈라고 여가 좀 앉아있어!” “예! 그러세요! 잘하셨네요!”하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아다 드리며 “할머니! 추운데 커피 한잔하세요!”하였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우메! 이라문 안된디 미안해서 으짜까? 잘 묵것소~오! 고맙소 잉!”하시며 커피를 한 모금씩 천천히 드시는 모습을 보니 문득 작년 가을의 일이 생각납니다. 작년 늦가을 어느 날 제가 보성읍 봉산리 노산마을로 우편물 배달을 하다가 할머니 댁에 편지 한 통이 있어 할머니 댁 마당으로 들어가자 할머니께서 때마침 마루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조심조심 할머니가 깨지 않도록 할머니 머리맡에 편지를 놓아두고 살그머니 나왔는데 “아저씨! 아저씨! 이것이 뭣이여?”
하시며 어느새 잠에서 깨신 할머니께서 방금 전 제가 놓아두고 나왔던 편지를 가지고 저에게 물으십니다. “아니! 할머니 주무시더니 저 때문에 일어나셨어요?” “늙은이가 잠을 자문 을마나 깊이 자간디! 금방 일어나 불제~에! 그란디 이것은 뭔 편지여?” “할머니 손자에게 이동전화 요금 고지서가 나왔네요!” “뭣이라고? 뭣이 나왔다고?” “이동전화 요금 고지서라니까요!” “이동전화가 뭣이여?” “엘지 텔레콤에서 휴대전화 요금 고지서를 보냈다고요!” “엔지가 으짠다고?” “할머니! 따라서 해보세요! 엘지 텔레콤!”
“아이고! 나는 잘 몰라!” “할머니 그게 아니고요! 할머니 손자 휴대폰 요금 고지서가 나왔다니까요!” “오~오! 휴대포~온! 그랑께 휴대폰 세(稅)가 나왔다고~오!”할머니께서는 이동전화 또는 엘지 텔레콤 같은 말은 잘 모르셔도 휴대폰이라는 말은 아셨는지 그때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시더니 “아저씨! 여가 쪼그만 있어봐 잉!”하시더니 갑자기 할머니 댁 텃밭 옆 울타리 쪽으로 가시더니 울타리 밑에 쭈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두리번거리며 찾으시다 이윽고 찾았다는 듯이 빙긋이 웃으며 가지고 나오신 것은
어린이의 머리 크기만 풋 호박 한 개입니다. “아저씨! 내가 자꼬 아저씨한테 뭣을 주고 싶었는디 줄것이 암것도 없당께 그랑께 이것 풋 호박 한 개 주껏 잉께 갖고 가서 썰어서 말려놨다가 인자 겨울에 해 잡숴봐! 잉!”하시며 매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오토바이 적재함에는 소포가 가득 실려 있는 바람에 할머니께서 주신 호박을 싣고 다닐 수가 없는 겁니다. “할머니! 호박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오토바이에 이렇게 소포가 가득 실려 있어서 호박을 싣고 갈수가 없는데 미안해서 어쩌지요?
호박 잘 놔 두셨다가 다음에 주시면 안 될까요?” 하였더니 “대차 그라네 잉! 으째 오늘은 이라고 소포를 많이 실고 왔어?”하시며 매우 서운해 하시는 표정입니다. “할머니! 호박 오늘 하루만 할머니 댁에 보관해 놓으세요! 제가 내일 와서 가지고 갈게요! 그럼 되겠지요?”하였더니 “그라문 쓰것구만 그라문 내가 저그 마루에 놔 두껏잉께 낼 내가 없어도 갖고 가 잉!”하시며 호박을 마루에 놓아두시는 것을 보고 다음 마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저는 다른 마을로 우편물 배달을 나가는 바람에
할머니의 호박은 그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오늘 우체국에서 할머니를 뵙고 나니 무엇을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어서 주지 못했다며 저를 생각하여 따 주신 풋 호박이 생각 난 것입니다. “할머니! 저를 생각하여 따 주신 호박을 가지러 가지 못한 작년 가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생각하여 주신 마음은 늘 잊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건강하게 오래 오래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