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이야기

밀감 네 개

큰가방 2010. 1. 17. 11:06

 

밀감 네 개

 

1월 중순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한번 찾아온 차가운 날씨는 떠날 줄을 모르고 여전히 우리 주위에 머물면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논과 밭이 길게 이어지는 시골 들판에서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불구하고 산비둘기 몇 마리가 이 논에서 저 논으로 먹이 찾기에 분주한데 지난 김장철 미처 수확하지 못한 쪽파들이 엊그제 내린 하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잎이 모두 망가진 채 깊은 겨울잠에 빠졌는지 강한 바람이 불어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오늘도 나는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시골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전남 보성 회천면 화죽리 화당 마을에 접어들어 골목 끝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할머니께서는 아랫방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계시다 나를 보자 얼른 달려 나오시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날씨도 징하게 추운디 참말로 고생해 쌓네~에! 그란디 오늘은 뭣을 갖고 왔어?" 하고 물으셨다. "오늘은 전기요금이 나왔네요!" "그래에! 그란디 을마나 나왔어?" "만 2천 5백 4십 원이네요." "전기를 아무리 애껴 쓴다고 해도 항상 그라고 많이 나오네!"

 

"그래도 할머니 전기요금은 적게 나온 편이에요. 날씨가 차가운 겨울이면 아무래도 전기를 더 사용하게 되니까. 요금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아랫방에 군불은 왜 지피고 계세요?" "보일라를 돌리고 싶어도 지름 값이 너무 비싼께 돌릴 수가 없어! 전기세도 무섭고! 그랑께 아랫방에 군불 잔 때 놓고 밤이문 내가 들어가서 자고 그래!" "그럼 보일러에 기름 값은 별로 안 들겠네요!" "그란디 보일라를 안 돌린께 다른 방은 추와서 들어갈 수가 없어!"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시고요?"

 

"식당 방에는 전기장판 깔아놓고 밥 해 묵을 때만 쪼깐 틀어놓고 안 그라문 꺼불고. 그라고 아랫방에는 군불 때 놓고 낮에는 회관에 놀러가서 있다가 밤이문 오고 그래!" "날씨가 추워지니까 여러 사람이 고생이네요! 그러면 회관 방은 따뜻하나요?" "사람들이 모인디 방이 따땃해야제! 안 따땃하문 사람들이 모이기나 하것어? 우리 같은 사람은 겨울에 회관 없으면 추와서 못 살 것이여!" "그래도 회관 방이 따뜻하니 정말 다행이네요! 요즘 날씨가 감기 들기 딱 알맞거든요.

 

감기 들지 않게 옷 따뜻하게 입고 계세요! 아시겠지요? 저 그만 가 볼게요!" 하고 막 대문을 나오려는 순간 갑자기 할머니께서 "아제! 이리 잔 와봐!" 하고 부르시기에 '무슨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왜 할머니께서 저렇게 급하게 부르시지?" 하고 다시 마당으로 들어섰는데 "내가 아제 오문 줄라고 이것을 갖고 댕겼는디 깜박 잊어 부렇네! 이것 갖고 가서 자셔!" 하며 양쪽 주머니에서 노란 밀감 두 개씩 네 개를 꺼내 빨간 오토바이 앞에 걸려있는 바구니에 넣어주셨다.

 

"밀감은 놔두셨다 할머니 심심할 때 드시지 저를 주세요?" "아제가 오문 항상 웃는 얼굴로 뭣을 물어봐도 찬찬히 잘 갈쳐주고 그래서 뭣을 잔 대접하문 좋것다! 그랬는디 늙은이 혼자 살다 본께 뭣 줄 것이 없네! 그란디 엊그저께 우리 딸이 왔다 감시로 밀감을 사 갖고 왔데! 그래서 으디 길에서라도 아제를 만나문 줄라고 며칠을 갖고 댕겼어! 그란디 만날 안 보여서 인자는 아제를 못 만날란갑다! 그랬는디 오늘 아제를 만났응께 이것 갖고 가서 자셔 봐! 잉!" 하신다.

 

"날씨가 너무 추우니까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그냥 놔두셨다 할머니 드세요!" "날씨 춥다고 밀감 몇 개 못 묵것어! 그라고 날씨가 추우문 그냥 집에 갖고 가서 자셔! 으째 늙은이가 준 것이라고 안 좋아서 그래?" "아니요! 할머니가 주신다고 해서 왜 싫어하겠어요?" "그라문 밀감이 적어서 그래? 딸이 갖다 논 것 더 있응께 더 갖다 주까?" "아니요! 밀감 잘 먹을게요! 안녕히 계세요!" 하고 대문을 나서는데 할머니께서는 마치 큰 빚이라도 갚은 듯 환하게 웃고 계셨다.

 

할머니께서 저에게 건네주신 밀감인데 맛있게 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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