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9월말이 가까워지면서 들녘에 누렇게 잘 익은 벼들이 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오가는 길손을 부르고 있는데 하릴없이 꼬리가 빨개진 고추잠자리 한마리가 살며시 내 옷소매 내려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내가 전남 보성 회천면 군농리 화동마을 기다란 농로 길로 접어들었을 때 이상하게 주위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누렇게 잘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논에는 어느새 수확이 모두 끝나 볏짚만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왕복 1km쯤 떨어진 외딴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식용유 있습니다. 밀가루도 있어요. 튀김가루. 막걸리도 있어요,”하며 트럭에 식료품을 싣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분께서“아이고! 여기까지 편지 배달 오셨어요?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하고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저야 우편물을 배달하기 때문에 당연히 와야 하지만 사장님께서는 여기까지 물건 팔러오셨어요?” “지난번에 아주머니께서 부탁하신 것도 있고 해서 물건도 팔 겸 오늘 배달해 주려고 왔어요.”하자
옆에 계신 아주머니께서 “우리 집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여기 장사하는 아저씨 아니면 소금에 밥을 먹어야 해요. 우리 형편에 자주 시장이나 마트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요즘처럼 바쁜 때는 하다못해 간장이나 식용유가 떨어져도 사러나갈 시간이 없으니 신세를 많이 지고 있어요.” “바쁜 가을철이라 더 그러시겠지요. 그런데 사장님! 장사는 잘되시나요?” “요즘 시골이 하다 바쁘다 보니 마을에 돌아다녀도 사람 만나기가 힘들어서 물건을 팔수가 없어요.”
“바쁜 때는 사람들이 모두 논이나 밭에 나가 곡식 걷어 들이고 또 말리고 손질해서 곡간에 쌓아두어야 내 것이 되니 모두들 정신들이 없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네요! 그럼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하고 다음 마을로 그리고 두곡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데 마을 회관 앞을 지나려는 순간 할머니 한분께서 회관 앞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우체국 아자씨~이! 이리 잔 와봐~아!”하며 나를 부르신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오늘도 무척 바쁘실 텐데 일은 안하고 무슨 일로 여기 앉아계세요?” “혹시 차(車) 갖고 댕김서 장시하는 사람 못 봤어?” “식료품 팔러 다니는 차 말씀이세요?” “요새는 하다 바쁘다 본께 통 우리 영감 반찬에 신경을 안 썻드만 밥 묵을 것이 한나도 읍네! 그래서 오늘은 일도 안가고 여그서 차 지나가문 뭣을 잔 살라고 했는디 암만 지달려도 안 오네!” “아까 저쪽 화동마을에서 차를 만났는데 아직 여기까지는 못 왔나 보네요.” “그라문 그 사람한테 이리 잔 빨리 오라고 할 수 업으까?”
“제가 그 분 연락처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하지요?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전화 번호라도 적어두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네요.” “그랑께 말이여! 우리 영감도 인자 나이를 묵어논께 심이 부친가 으짠가 옛날 같이 일도 못해! 그람시로 술이 한잔 묵고 싶은가 찾어싼디 쇠주는 또 독해서 못 묵것다고 그래싼께 막걸리가 있으문 좋것는디 갖고 댕긴가 몰르것네!” “제가 확성기로 외치고 다니는 것을 들어보니 막걸리는 가지고 다닌다고 하던데요.” “그래 잉! 그라문 꼬치장 같은 것도 갖고 댕기까?”
“고추장이나 간장은 물론 가지고 다니겠지요. 식료품을 판매하는 차량인데 그런 것이 없으면 무엇을 팔러 다니겠어요?” “그라문 좋것제~에! 그란디 장갑도 있는가 몰르것네?” “글쎄요! 장갑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잉! 그란디 그 차는 으디서 뭣을 하간디 이라고 올라고 생각도 안하고 있으까?” 하는 순간 마을입구에서 “막걸리 있습니다. 설탕 있습니다. 식용유. 밀가루도 있어요.”하는 확성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가을빛이 드리워진 들녘입니다.
시골마을 공터에는 콩이며 팥 고추까지 가을 햇볕을 즐기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