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이야기

나쁜 딸내미

큰가방 2010. 9. 12. 18:14

 

나쁜 딸내미

 

엊그제 일 년 중 가장 무덥다는 말복(末伏)이 지나갔으나 여전히 하늘의 이글거리는 태양은 쉬지 않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는데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시골길 옆 논에는 엊그제 벼 이삭이 패는가 싶더니 어느새 조금씩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며 가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시골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넓은 공터에는 오늘도 따가운 햇살아래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부지런히 밭에서 따 온 붉은 고추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오늘도 우편물을 배달하러 시골마을로 달려가는 길. 내가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전남 보성 회천면 봉강리 모원마을에 들어서자 어르신들이 모두 시원한 정자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 나를 보고 “어~이! 이리와 이것 잔 가져가불소!”하기에 가까이 다가가 빙긋이 웃으며“오늘은 주민세 주시려고 그러시지요?”하였더니 깜짝 놀란 얼굴로“자네가 그것을 우추가 안가?” “요즘은 주민세가 아니면 어르신들이 제게 주실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란가? 나는 말 안 해도 자네가 척하니 알아 묵어서 점쟁인지 알았네!”

 

“예~에? 제가 점쟁이라고요?” “아니! 아니여!”괜스레 미안한 표정을 짓는 어르신“미안하제만 이것 잔 우체국에 갖고 가서 바쳐 불소! 잉!”하시자 옆에 계신 할머니께서도“우리 껏도 갖고 가서 바쳐 줘!”하시더니“그란디 주민세가 을마여?” “3천 3백 원인데요.” “그래~에! 으째 세금이 우리 집이나 옆에 집이나 똑 같단가?” “주민세는 재산이나 식구 수와는 전혀 상관없이 어느 가정이나 3천 3백 원씩 똑 같아요.”하며 여기저기서 건네주는 주민세를 받아 비닐봉지에 넣으며 “오늘은 어르신들이 돈을 많이 주시니 부자 되겠네요!” “그것이 자네 돈이어서 부자 되야?”

 

“이따 우체국에 가면 제 돈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제 돈이지요.” “허! 허! 헛! 그런가?”하는 순간 “아자씨! 이것 잔 갖고 가서 부쳐줘!”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골목어귀에서 할머니 한분이 바쁜 걸음으로 다가 오시더니 달력을 찢어 둘둘 말아 테이프로 붙인 안경케이스 정도 크기의 주소도 적혀있지 않은 것을 내 밀었다. “할머니! 이게 무엇인가요?” “그것? 핸드퐁 약이라고 그라데!” “그런데 이것을 어디로 보내시려고요?”

 

“우리 딸한테 보낼라고! 써글 껏이 무담시 우리 집 오드만 나를 이라고 성가시게 해쌓네!”하며 종이 한 장을 내 놓고 “여그 주소 있제? 우게껏 말고 아래껏 한테 보내 주문 되야!” “아래 주소면 경기도 용인으로 보내달라는 말씀이세요?” “잉! 그것이 우리 작은 딸잉께 그리 보내 주문 되야!” “우편요금이 2천 5백 원쯤 될 텐데 그냥 3천원 주세요! 잔돈하고 영수증은 내일 가져다 드릴게요.”하였더니 깜짝 놀란 할머니 “그것이 그리고 비싸?”

 

“2천 5백 원이면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그것을 우리 딸이 돈 내게 부치문 안 되까?” “그렇게 할 수도 있기는 한데 왜 따님에게 돈을 내라고 하세요?” “엊그저께 즈그 식구들이 우리 집이 왔다 갔는디 내가 손해를 많이 봐 부렇어!” “무슨 손해를 보셨는데요?” “암껏도 안 사들고 빈손으로 와 갖고 내 돈 들여 닭 사다 삶아줬제. 고기 사다 꿔 묵었제. 그래놓고 용돈 한 닢도 안 주고 가불드란께! 그란디 또 내 돈을 3천원이나 들여 갖고 그것을 보내 주문 쓰것어?”

 

“그러면 따님에게 용돈 좀 많이 달라고 하지 그러셨어요?” “나도 용돈 좀 주고 가라 그랬제!” “그런데 뭐라고 하시던가요?” “엄마가 촌(村)에서 돈 쓸 일이 으디가 있는가? 그람시로 그냥 가 불드란께!” “정말 화가 나셨겠네요. 그러면 사위도 그렇게 미운가요?” “우리 사우는 안 미와! 나를 을마나 생각한다고!” “그러면 용돈은 주고 가던가요?” “우리 딸 모르게 쪼간 주고 가데!” “사위가 용돈을 주고 갔으면 그 돈이 그 돈 아닌가요?”

 

 

섭씨 30도가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도 붉은 고추 수확은 쉴 틈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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