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자전거

"할머니 죄송합니다!"

큰가방 2005. 11. 27. 10:25

“할머니 죄송합니다!”


11월 중순 어느 날부터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버린 맑고 청명하고 아름답던 가을 대신 차가운 바람을 몰고 찾아온 겨울이 며칠 전부터 휴가를 떠났는지 따뜻하고 포근한 늦가을의 날씨가 다시 계속되고 있습니다. 늘 푸르름이 가득하던 멀리 보이는 산들이 초겨울이 지나가며 뿌려놓은 울긋불긋한 물감을 뒤집어쓰고 이제야 가을이 시작되었다는 듯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시골마을로 향하는 길가의 이쪽저쪽 밭에는 오늘도 쪽파를 수확하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저는 오늘도 그 길을 따라 행복이 가득 담긴 우편물을 빨간 오토바이 적재함에 싣고 시골마을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우편물을 배달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5시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매월 15일부터 25일까지 각종 공과금 고지서가 집중적으로 각 가정에 배달되기 때문인데 오늘은 각 가정으로 전화요금 고지서를 배달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마지막 우편물을 배달 할 전남 보성 회천면 벽교리 명교마을로 들어서면서

 

*해변에 이제야 찾아온 가을은 지각을 하였을까요? 


지금까지“해가 저물어지기 전 우편물 배달을 모두 끝내야지!”하며 잠시도 쉬지 못하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조급한 마음은 사라지고“오늘도 하루의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구나!”하는 편안함을 느끼며 명교 아랫마을 입구에 들어섰는데 “아저씨~이! 나 좀 보고 가~아!”하시며 할머니 한분께서 저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빨간 오토바이를 잠시 멈추고 “할머니 왜? 그러세요?”하고 대답하였더니 할머니께서 빙그레 웃으며 제 옆으로 다가와 고지서 한 장을 내놓으며 “아저씨! 이것이 뭣이여?”하고 묻습니다.


“할머니! 이것은 유선방송 시청료고지서인데요!” “그라문 돈이 얼마 나왔어?” “할머니 유선방송 시청료는 매월 똑 같아요. 4천 4백 원이에요!” “그래~에? 그라문 아저씨가 성가셔도 우체국에 잔 갖다 바쳐줘 잉!” “예~에! 그렇게 할게요!” “아저씨 그란디 내가 돈을 안 갖고 왔어! 내가 얼렁 우리 집 가서 돈 갖고 올랑께 여그서 쪼금 기달리문 안되까?” “할머니 아직 제가 이 마을 우편물을 배달하지 못하였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이 마을과 윗마을에 우편물 배달을 끝내고 올게요. 그동안 할머니께서는

 

*가을은 높은 산에서 저를 내려다 보며 웃고있었습니다.

 

돈을 가지고 나오시면 어떻겠어요?”하였더니 “그라문 좋제~에!”하셔서 “할머니 그럼 저 다녀올게요. 조금 있다 여기서 만나요!”하고 부지런히 아랫마을 우편물 배달을 끝내고 윗마을로 들어섰는데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윗마을에는 하수관 묻는 공사를 하는 바람에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양쪽을 길을 막고 커다란 중장비가 골목길을 깊게 파내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아니? 이건 무슨 일인가? 잠시 후면 주위가 어두컴컴해 질 텐데 하필 이 바쁜 때 하수관 공사라니 이제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을 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빨간 오토바이는 도로 한 쪽에 세워놓고 우편물을 손에 들고 마을의 골목길을 열심히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집 우편수취함에 우편물을 투함하고 나서 “아~아! 드디어 오늘하루의 일과는 끝이로구나!”하며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누군가 “우체부 아저씨~이!”하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할머니 한분께서 공사를 하느라 깊이 파헤쳐진 골목길을 뛰어나오며 저를 부르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왜? 그러세요?”하고 대답을 하였더니

 

*해변의 가을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아저씨 이것은 우리 것이 아닌디 우리 집에 갖다놨데 근디 이것이 뭣이여?”하고 물으십니다. “이상하다? 분명히 할머니 댁 전화요금 고지서를 확인하고 우편 수취함에 넣었는데 왜? 할머니께서 아니라고 하시지? 내가 배달을 잘못하였나?”하고 “할머니 그건 할머니 전화요금 고지서 맞을 텐데 그러세요?”하였더니 “아니여! 내 이름은 정영례인디 여그는 김인창 이라고 써 있구만 우리 집 전화요금이 아니여! 으째 우리 것은 안 갖고 왔어?”하십니다. “할머니 고지서를 이리 줘보세요!”하고 고지서를 받아들었는데 고지서에는


‘김인창 옆집 정영례 고객님’이라고 주소가 적혀있는 겁니다. “할머니 이것은 할머니 댁 전화요금 고지서가 맞잖아요? 여기 ‘김인창 씨 옆집 정영례 고객 님’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그런데 할머니 전화요금이 아니라고 하시면 어떻게 해요?”하였더니 “그랬어? 내가 잘못 봤을까 이상하네? 금방까지 우리 것이 아니었는디?”하시기에 김인창 씨 댁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할머니 이쪽 집이 김인창 씨 댁이지요? 그리고 옆집이 할머니 댁이고요? 그러니까 ‘김인창 씨 옆집 정영례 고객 님’ 딱 맞잖아요? 안 그래요?”하였더니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과나무의 모과가 아직도 가을 임을 확인 시켜주는 듯 하었습니다.


“대차 그라고 본께 맞네! 내가 밑에는 안보고 위에 있는 주소만 봤는 갑구만! 아저씨 미안해!”하고 있는데 어느 틈에 할머니 한분께서 제 옆으로 다가오시더니 “우체부 아저씨가 오늘은 저물었네! 그란디 나 뭣 좀 물어 보께 내가 집에 있는디 으디서 전화가 왔드랑께 ‘할머니 성함이 정말례 씨가 맞아요? 할머니 핸드폰 가지고 계시지요? 요즘 할머니들께서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하시니까 전화요금이 저렴한 휴대전화가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라드란께 그래서 ‘나는 휴대전화도 없고 휴대전화도 쓸지 모르요!’했드만


‘그러면 할머니 전화 아껴서 쓰세요!’하고 전화를 끊어 불데 그란디 그 전화가 면사무소에서 왔으까?”하고 물으십니다. “할머니 면사무소 직원들이 얼마나 바쁜데 할일이 없어 할머니께 휴대전화 가지고 계시냐고 전화하겠어요?” “그라문 누가 했으까? 그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드랑께!” “할머니 그것은 전화번호부에 전화 가입자 이름이 있으니까 금방 알 수 있어요! 할머니 댁 전화 가입자가 할머니 이름으로 되어 있지요? 그런데 혹시 그 사람들이 할머니 주민등록번호나 집 주소 같은 것 물어보지 않던가요?”

 

*시골 집 정원에는 조그만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가 있었습니다. 나무열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나는 휴대전화도 없고 쓸지도 모르요! 한께 전화를 끊어 불데 그래서 안 갈쳐줬어!” “잘하셨어요. 다음에 또 혹시 그런 전화가 와서 할머니 주민등록번호나 집 주소를 물어보면 절대 가르쳐주지 마세요. 아시겠지요?” “대차 아저씨 말을 듣고 본께 그라네 참말로 조심해야 쓰것네 잉?” 하고 할머니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주위는 완전히 캄캄해져 버렸습니다. “할머니 저 그만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우메~에! 이라고 캄캄해져 부렇는디 어떻게 우체국까지 가것어?” “그래도 가야지요.


우체국에서 저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겠어요? 안 그래요?” “대차 그라것네 그라문 조심해서 가씨요! 이~잉!”하시는 할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어둠을 뚫고 천천히 우체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잔무정리를 하고 있는데 ‘아뿔사!’ 한 가지 빼 먹은 게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유선방송 시청료 납부를 저에게 부탁하신 할머니를 깜박 잊고 그만 우체국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이고! 이일을 어떻게 하나? 날씨도 추운데 할머니께서 얼마나 나를 기다리고 계셨을까? 그렇다고 다시 할머니 댁으로 갈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곱고 예쁜 머리를 바람에게 빼앗겨 버린 억새가 무척 쓸쓸하게 보였습니다.


하는 생각을 하다 할머니 댁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할머니 저 우체국 집배원이에요. 아까 할머니께서 부탁하신 일을 깜박 잊고 그냥 우체국에 돌아오고 말았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윗마을에서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날이 저물어 버려서 그만 잊어먹었지 뭐예요!” “그랬어? 나는 날은 캄캄해 진디 암만 아저씨를 기달려도 아저씨가 안와서 오늘은 틀렸는 갑다! 하고 그냥 집으로 들어와 버렸어!” “할머니! 오늘 제가 심부름 안 해드렸다고 혹시 욕하신 것은 아니지요?” “와따~아! 별 소리를 다하네 사람이 바쁘문


그럴 수도 있제~에! 나는 날이 캄캄해져서 아저씨가 혹시 뭔 사고라도 났는가 걱정했는디 아무 일없이 우체국에 들어갔다 그렁께 좋구만! 걱정 말고 내일 우리 집이 와서 시청룐가 뭣인가 받아가 이~잉!”하시며 전화는 끊겼습니다. 윗마을에서 잠시 할머니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저를 기다리다 끝내 저를 만나지 못하고 실망하셨을 할머니께 정말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할머니께서는 오히려 밤 길 오토바이 운전 중 혹시 사고라도 났을까 봐 저를 걱정하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할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내일은 잊지 않고 할머니 심부름 꼭 해드릴게요. 언제나 건강하세요!”

 

*호호백발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억새 옆에서 겨울이 웃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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