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접어들면서 햇볕은 한 여름을 방불케 하는 폭염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집배원 정복
의 반 팔 와이셔츠 입고 다니는 저의 팔이 뜨거운 햇볕 때문에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더
니 어느새 구리 빛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뜨거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
골 마을의 들녘에는 어느새 모내기 행사가 모두 끝이 나고 이제 갓 심어놓은 파릇파릇한 어
린 모들이 때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산들바람에 고개를 한들거리며 풍년농사를 약속하는 듯
저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빨간 오토바이에 가득 실려진 우편물과 함께 달려와 도착한 곳은 전남 보성읍
봉산리 덕정 마을입니다. 덕정 마을의 첫 번째 집으로 들어가자 때 마침 논에서 일을 마치
고 새참을 드시는 마을의 어르신들을 만났습니다. “어이! 마침 잘왔네! 이루와서 앉어! 잉!
그라고 여그 막걸리 한잔하고 가소! 집이서 담근 술인디 참말로 맛이 좋단 마시! 잉! 어서
그러랑께!” 하시는 마을의 어르신의 말씀에 “어르신 지금은 오토바이를 타는 중이라 서요
술을 마시면 안돼요!” 하였더니
“이 술은 집이서 맨든 술이라 맛이 진짜로 좋당께 얼렁 이루와서 한잔만 하고 가란 마시!
잉!” 하십니다. “어르신 지금은 술을 마시면 안되고요! 술을 정말 주시려면 그냥 되 병에
하나 담아주세요!” 하였더니 “아니! 술을 병에다 담아주라니 뭔 소리여?” 하시자 옆에 계신
어르신께서 “아따! 이 사람아! 아! 술을 병에다 담어 주문 갖고 가서 이따가 편지 배달 끝
나문 사무실에서 묵을라고 그랑갑구만!” 하십니다. 그러자 술을 권하시던 어르신께서 “응
그래 잉! 가만있어봐 잉! 어이! 술 좀 남은 것 있는가?”
하고 할머니에게 물으시더니 “어이 그란디 술이 없다 근디 으짜까? 미안해서!” 하십니다.
“어르신! 술 없어도 괜찮아요! 제가 그냥 농담으로 그랬는데 저 그만 가 볼게요!” 하고서는
다음 집으로 향하다 문득 막걸리 때문에 생겼던 아주 오래 전 일이 생각납니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 집배원으로 발령을 받아서 전남 신안군 안좌면 안좌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배달하
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에는 빨간 자전거에 큰 가방을 걸고서 우편물을 배달하던 때인데 아
마 지금처럼 모를 심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지금처럼 이앙기나 트랙터는 보급이 되지 않을 때인지라 모든 농사를 사람의 손으
로 해 내던 시절인데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은 안좌면 어느 마을의 편지 배달을 거의 끝내
고 평소에도 그 분의 며느리가 저와 같은 보성 사람이라고 저를 사돈이라고 부르시는 어르
신 댁의 마당으로 들어서자 어르신께서 “어이! 사돈 오셨는가?” 하시며 저를 무척 반겨주시
더니 “어이! 사돈 이리 와서 막걸리 한잔하고 가게!” 하시는 겁니다. 때마침 초여름 날씨인
지라 날씨가 덥기도 하고 목도 마르고 또 배도 고프기도 하여서
어르신께서 권해주시는 커다란 대접에 담긴 막걸리 한잔을 사양도 않고 그냥 벌컥벌컥 단숨
에 다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마을을 향하여 커다란 고개를 넘어갑니다. 그 고개는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한적한 고갯길인데 굉장히 가파르기 때문에 자전거를 끌
고 가지 못하고 어깨에 걸쳐 매고 고개를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고갯길이 가도가도 끝
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다 숨은 차 오르고 땀은 비 오듯 쏟아지는데 정신까지 몽롱한 지경
입니다. 그러나 적당히 앉아서 쉬어 갈만한 장소도 없고
태양 빛은 사정없이 저를 향해 쏟아 붓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어찌 어찌해서 간신히 고갯마
루에 도착하였을 때는 저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고갯마
루에 커다란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는데 소나무 그늘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자 지
금은 사라져버린 커다란 돛단배 몇 척이 선단을 이루어서 흑산도 쪽으로 소리 없이 천천히
미끄러져 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고 잠시 그 모습을 바
라보다 그대로 쓰러져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제가 잠이 들었던 소나무 그늘은 어느새 반대편으로
돌아가 버렸고 제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린 것은 빨간 자전거와 자전거에 걸려있던 큰
가방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인데 집에서 막걸리를 담그면 처음 막걸리 원액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원액에 몇 배의 물을 섞어 희석을 시켜 마시는데 그때 어르신께서는 잠
시 기다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그냥 원액을 희석을 시키지도 않고 저에게 권하셨던 것 입
니다. 그래서 막걸리 원액 한 사발을 마셔버린 저는 그만 술에 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지도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반가운 사돈이 왔다며 막걸리 원
액을 권해주신 그때의 어르신은 지금 아마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지금까지 살
아 계신다면 백살이 넘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때 막걸리 원액을 마시고 고생을
하였던 저는 지금도 시골마을에서 담은 맛있는 막걸리를 권하면 절대로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빨간 자전거를 타고 편지 배달을 하던 시절에는 음주운전이니 과속이니 난폭 운전이
니 하는 말은 들어볼 수도 없었고
마을 주민들과 오고가며 권해주시는 막걸리 한잔에 정을 주고받고 하였는데 이제는 시골마
을의 주민들께서 술을 권하면 “어떻게 하면 술을 마시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까?” 하고 먼
저 꽁무니를 뺄 궁리부터 해야하니 아! 정말 빨간 자전거가 그립습니다.
'빨간자전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마 비가 내리던 날 (0) | 2004.06.26 |
---|---|
파리 떼 모여들던 날 (0) | 2004.06.20 |
공짜가 아니여! (0) | 2004.06.06 |
당뇨병의 약 (0) | 2004.05.30 |
나여! 나~아! (0) | 2004.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