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
“할머니! 우편 수취함 가져왔는데 어디에 달아드릴까요?” “오늘 비가 안온께 우편함을 갖고 왔는갑네! 아제가 알아서 잘 달아줘!”지난 수요일, 그날도 많은 비가 퍼붓던 날이었는데 내가 전남 보성 회천면 천포리 화곡 마을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을 때 마을 맨 끝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께서 엄청 쏟아지던 빗속에 조그만 우산하나를 쓰고 “아제~에! 아제!”하고 나를 부르며 대문을 나오셨다. “할머니! 아직 세금 덜 내신 것 있으세요?
그러면 내일이나 내시든지 하시지 이렇게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저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니~이! 그것이 아니고 저기 우체통 안 있어? 새것하나 갖다 달아주면 좋것는디!” “할머니 우편함은 아주 좋은데 왜? 새 우편함으로 바꾸려고 하세요?”하며 우편 수취함을 보았더니 어제까지 멀쩡하던 우편함이 어느새 보기 사납게 찌그러져 있었다. “아니? 왜 저렇게 우편함이 찌그러졌어요? 혹시 누가 술 마시고 발로 걷어찼을까요?”하였더니
할머니께서는 빙그레 웃으며“아이고~오! 이 마을에 누가 술 마시고 우체통 발로 차서 저렇게 만들 사람이나 있어? 웃집 사는 우리 조카가 경운기에 뭣을 잔뜩 싣고 가다 걸려갖고 저라고 찌그러져 부렇어! 그란디 저 통은 우체국에서 그냥 달아주는 것이제?” “할머니~이! 우체국이 무슨 돈이 있어 우편함을 그냥 달아드리겠어요? 한 개에 오천 원씩이니까 열개면 5만원 백 개면 오십만 원인데 혹시 하나라도 공짜로 달아드리면 너도 나도 다 새것으로 달아달라고 아우성 칠 텐데
그렇게 많은 돈이 있겠어요?” “그 말을 들어본께 대차 그라것네 잉! 그라문 내가 오천 원 줄랑께 내일 한 개 갖다가 달아줄 것이여?” “그럼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혹시 내일 비라도 오면 우편함을 가져오더라도 벽에 못질을 해야 하는데 곤란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비 오지 않는 날 가져와 달아드릴게요. 아시겠지요?”하였더니 “아이고~오! 무슨 비가 이라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지 몰르것어! 제발 비 좀 그만 오면 좋것는디 그나저나
내가 아제한테 부탁한께 잊어 불지 말고 꼬~옥! 갖다 달아줘 잉!”하셔서 “예~에! 걱정하지 마세요.”하고 약속하였는데 어제는 그제 보다 더 많은 비가 퍼붓는 바람에 우편 수취함을 가져오지 못하였는데 화곡 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러 갔더니 그때는 이슬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할머니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제! 우체통 갖고 왔어?” “할머니! 어제 제가 비가 오면 우편함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했는데 여태 기다리고 계셨어요?”
“지금은 비가 조금 뿐이 안온께 혹시나 하고 기달리고 있었제~에!” “오전에는 비가 많이 와서 못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우편함이 조금 늦더라도 무엇이 그리 급하세요?” “노인 사는 집에 저라고 이상한 것이 달려있으문 보기 싫은께 그라제~에!” “그렇기는 하네요. 그러면 내일은 꼭 가져와 달아드릴게요.” “그라문 내일은 잊어불지 말고 꼭 갖고 와 잉!”하고 약속하여 오늘 새 우편함을 달아드렸더니 할머니께서는 마치
커다란 새 살림살이라도 장만하신 것처럼 환하게 웃고 계셨다. 그리고 할머니의 환한 웃음 속에 나는 문득 30년 전의 여름날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우편함이 없었던 30년 전, 빨간 자전거에 우편물을 넣은 큰가방을 걸고 배달하던 시절의 무더운 어느 여름날, 전남 보성읍 봉산리 오서(五瑞)마을의 높은 오르막길을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데 어찌나 많은 땀이 흘러내리는지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마을로 오르는 길 중간쯤에 있는 정자나무 아래
그 시절 오서마을에서 신문을 보던 영감님께서 시원한 옷차림으로 부채를 부치고 앉아계시기에 “어르신 안녕하세요? 신문 여기서 그냥 드릴까요?”하고 물었더니 커다란 안경 너머로 나를 보던 영감님께서“날씨도 무더운데 고생해쌓네 내 신문은 집으로 갖다놓게!”하시는데 “영감님이 여기서 신문을 받으면 내가 저 윗마을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데 기어코 집으로 갖다놓으라고 하시니!”하는 생각을 하자 얼마나 야속하던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마을 입구에 빨간 자전거를 세워놓고 신문 한부를 들고 터덜터덜 높은 골목길을 걸어올라 영감님 댁 대문으로 들어가서는 신문을 마루를 향하여 힘껏 던졌는데 신문은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지붕 위로‘툭!’떨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영감님이 집으로 돌아오시면 어떻게 하지?”하며 기다란 장대를 이용하여 신문을 지붕에서 건져 내리느라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던지, 그러나 지나가버린 그 시절이 갑자기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가을 장마 속에서도 벼는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검정 쌀 벼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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