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자전거

화재(火災)의 끝

큰가방 2006. 5. 9. 22:28
화재(火災)의 끝


계절의 여왕 5월이 시작되자마자 이른 아침부터 어디서 날아왔는지 저의 집 뒤쪽 숲 속에 한 마리 두 마리 새들이 모여들더니 아름다운 목소리로 합창을 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저는 오늘도 새로운 주인을 찾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와 저에게 배달해 주기를 기다리는 정성과 행복이 담긴 우편물을 빨간 오토바이 적재함에 가득 싣고 시골마을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시골마을로 향하는 길, 멀리 보이는 산에는 어제보다 더욱 푸른 신록이 아름답게 우거지고 있으며 들판에 보이는 보리밭에는 온통 초록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


청 녹색 물결을 이루며 지나가는 바람에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들판에 도로변에 양지바른 언덕에 하얗게 빨갛게 노랗게 잉크 색으로 피어있는 이름모를 조그만 들꽃들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저를 반겨주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하얀 나비 두 마리가 양 날개를 팔랑거리며 들꽃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다시 저의 주변을 잠시 맴돌고는 어디론가 멀리 멀리 날아갑니다. 시골집 정원에 빨갛게 하얗게 피어있는 철쭉꽃의 아름다운 자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언제 다가왔는지 제 주위를 ‘윙 윙’거리며 날아다니는


꿀벌들의 소리에 깜짝 놀라 얼른 몸을 피하기도 하면서 “봄은 언제나 아름다운 계절이구나!”하는 것을 느끼며 달려온 곳은 전남 보성 회천면 동율리 동율 마을입니다. 동율 마을 중간쯤에서 멀리서 바라보면 아담하고 예쁘게 보이는 이층 스라브 집에 등기편지 한통을 배달하려고 대문에 앞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왠지 모르게‘뭔가 좀 이상하다?’하고 느끼면서“어르신! 등기편지 왔네요! 집에 계세요?”하고 주인을 부르면서 현관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스라브 이층집이 완전히 새까맣게 불에 타버려서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다? 지난주에 다녀갔을 때도 멀쩡했던 집이 언제 불이 나서 이렇게 타버렸지? 이집은 어린애도 없어 누가 불장난 할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하다 이렇게 불이 났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구요? 누가 왔어?”하며 정원에 있는 커다란 감나무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계시던 할머니께서 넋이 나간 듯 힘없는 조그만 목소리로 저를 부르십니다. “할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언제 이렇게 불이 났어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금메! 나도 모르게 타버렸어! 아이고! 이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두 늙은이들은 어디서 살아야 할지 갑갑하기만 해!”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불이 나버렸어요?” “엊그저께 내가 가스렌지에 뭣을 올려놓고 깜박 잊어 불고 영감하고 같이 밭에 잔 갖다 왔는디 밭에 갔다 온 순간 불이 나서 다 타버렸어!” “그럼 세간 살이는 하나도 건지지 못하셨나요?” “밭에 가서 일하고 온께 다 타버렸는디 뭣을 끄집어낼 수나 있것어? 아이고! 이일을 어째사 쓰꼬?”


“그러셨어요? 그럼 혹시 마을 사람들이 불났다고 연락 안 해주시던가요?” “마을에 사람이 있어야 연락을 하든지 말든지 하제~에! 요새는 논에 가도 일이 많고 밭에 가도 일이 많은께 모두들 들에 가서 일하니라고 마을에 사람들이 없어! 그렁께 불이 난지 으짠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제~에!” “그럼 소방서에 불났다고 신고도 못하셨겠네요!” “몰라 소방서에서 왔다 갔는지 어쨌는지 밭에서 일하고 와서 대문을 열고 본께 뭣이 좀 허전하다! 하고는 방문을 열라고 본께 아무것도 없이 다 타부렇드만!”


“정말 황당하셨겠네요! 그럼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다행이 영감하고 나는 다친 데는 없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럼 자제분들에게 연락은 하셨어요?” “연락을 한께 금방 왔드만 그란디 즈그들도 뭣을 우추고(어떻게) 할지를 몰른께 답답하기만 하제~에! 그란께 모두 모여서 울기만 하고 갔어! 다시 온다고 하면서!” “그럼 잠은 어디서 주무세요?” “잠? 잠은 이 아랫집에 빈방이 있어서 우선 거그서 자고 있는디 언제까지 거기서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 살림살이 하나 건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다 타버렸는디 뭣을 우추고 해야 할지 아이고~오!” “할머니!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 다친 데는 없으니까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니까 마음 편히 생각하세요!” “금메! 그라고 생각하문 또 그런디 얼른 그라고 안된께 나도 답답해!” “할머니 그런데 등기편지가 한통 왔네요!” “으디서 온 편지여?” “화재보험 회사에서 왔는데요!” “화재보험? 으째서 화재보험회사에서 등기편지를 보냈으까?” “내용은 저도 잘 몰라요! 이따 할아버지오시면 뜯어보세요! 아시겠지요?”


“으~응! 알았어! 그나저나 고맙소! 이렇게 위로까지 해 줘서 아저씨도 우리 같이 불 안 나게 불조심 잘 하씨요! 알았제?” “예! 할머니 잘 알았어요! 안녕히 계세요!”하며 할머니 댁을 나왔습니다. 시골에서 바쁜 농사철이 시작되면 어느 때는 마을에 사람의 그림자조차 만나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웃집에 불이 나더라도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 종종 있다고 들었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집을 몽땅 태워버린 할머니 내외분께서 부디 용기를 잃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시골마을 앞 보리 밭입니다.

'빨간자전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을 느끼던 순간  (0) 2006.05.23
가장 귀한 선물  (0) 2006.05.14
어머니의 마음  (0) 2006.04.30
"배고파 죽을 뻔했어!"  (0) 2006.04.25
두 번 먹은 점심  (0) 200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