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자전거

좋은 기억 나쁜 기억

큰가방 2007. 8. 5. 21:20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언제나 우편물을 배달하려고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시골마을에 접어들면 조용한 마을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개짓는 소리와 커다랗고 높은 나무에 붙어 마을이 떠나갈 듯 노래하는 매미소리 뿐이었는데 8월에 접어들자마자 날씨는 매일처럼 섭씨 30도가 웃도는 폭염에 휩싸이자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하고 직장에서는 여름휴가가 시작되어서 그런지 시골마을 빈터 여기저기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하얀, 검은, 밤색, 크고 작은 승용차들이 줄 지어 서있고 어린이들의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마을에 메아리쳐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요즘의 시골은 모처럼 어린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활기가 넘치면서 시골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전남 보성 회천면 봉강리 봉서동마을 맨 아랫집에 우편물을 배달하려고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마당으로 들어갔는데 마당에는 태양빛을 가릴 수 있는 커다란 차양이 둘러쳐있고 두개를 합쳐 놓은 넓은 평상에는 남녀노소 가족들이 모두 모여앉아 커다란 쟁반에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을 잘라 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는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가족모임이신가요?” “아저씨! 날씨가 너무 무더운데 정말 수고가 많으시네요. 잠깐 이리 오셔서 수박 한 조각 들고 가세요. 금방 냉장고에서 꺼내온 수박이라 아주 시원하고 맛이 좋아요!” “그렇지 않아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아제! 어서 이리 선풍기 앞으로 와! 어서! 쪼깐이라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면 시원하제~에! 아이고! 더운디 참말로 고생해쌓네~에!” “그래도 저는 도시의 집배원 보다 고생을 덜 하는 편이에요!”


“으째 도시 아저씨 보다 고생을 덜 해?” “여기는 시골이라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지열(地熱)은 적은 편인데 도시에서는 태양 볕도 볕이지만 아스팔트바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지열 때문에 숨이 막힐 때도 있거든요.” “진짜 아제 말을 들어본께 도시 사람들은 큰 고생이것네~잉!”하고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22~3세로 보이는 예쁜 아가씨가 “그런데 TV에서 보니까 시골 집배원 아저씨들은 마을사람들에게 생필품을 사다드리는 심부름도 해 주곤 하던데 여기서도 그런 심부름을 해주고 계시나요?”


“여기 회천면(會泉面)에서는 가정마다 차(車)가 있거나 차가 없으면 오토바이라도 있고 또 생필품을 구입할 수 있는 슈퍼나 농협 연쇄점이 2~3km 쯤 되는 곳에 있으니까 그런 심부름을 시키는 사람은 없어요.  TV에 소개되는 곳은 강원도 산간 오지마을이나 섬(島)지역 주민들이 주로 심부름을 시키곤 하지요.” “그럼 아저씨께서도 시골사람들에게 심부름을 해주신 일이 있으세요?” “저라고 왜 없겠어요?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제가 처음 빨간 자전거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할 때


그러니까 1970년대 말에는 저도 심부름을 많이 했어요.” “그때 무슨 심부름을 많이 하셨는데요?” “그 시절에는 주로 농약(農藥)이나 인피레스라고 부르는 빨대를 입으로 부는 요즘의 에프 킬라 같은 파리약, 노인들의 많이 사용했던 뇌신이라는 약(藥), 유리병에 들어있는 2ℓ 소주, 그리고 가끔 아이들의 간식거리용 사탕이나 과자 같은 것이 주로 심부름 대상이었어요.” “그러면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았겠네요?” “언제 한번은 어느 마을 영감님에게 2ℓ들이 소주 한 병을 사다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다음날 소주를 사가지고 가다 그만 자전거가 넘어지는 바람에 소주병이 깨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영감님께‘제가 깜박 잊고 소주를 못 사왔으니 내일은 꼭 사다드리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하고 다시 연쇄점에서 소주를 한 병 구입하는데 공교롭게도 소주 값이 200원이 올랐더라고요. 그래서 영감님께‘소주 값이 200원 올랐으니 200원을 더 주셔야겠습니다.’했더니 ‘아니? 뭔 소리를 하고 있어? 어지께 자네가 소주를 사 왔으문 소주 값이 안 올랐을 것 아닌가? 그란디 나 보고 200원을 더 주라고 나는 못 주것네!’하시는


바람에 어찌나 서운하던 지요!”하면서 나도 모르게 “하! 하! 하!”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평상에 앉아있던 사람들 모두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하였다. “아저씨 그런데 좋은 기억은 없으신가요?” “사람들은 이상하게 좋은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지만 나쁜 기억은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한답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또 다시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서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그 기억이 바로 좋은 기억 아닌가요?”

 

*무더운 여름!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전남 보성 회천면 율포해수욕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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