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번지, 밭 번지
“아제! 편지아제! 이리 잔 와봐!” “할머니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아니~이!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 집에 세금 낼 것이 잔 있는디 미안하제만 아제가 갖고 가서 바쳐 주문 안 되까?”오늘도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시골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는 길, 겨울의 짧은 하루해는 오후 5시가 되기 무섭게 서산 너머로 넘어가 버리면서 땅거미가 천천히 내려앉고 있는데 내가 전남 보성 회천면 군농리 화동마을 마지막 우편물을 배달하려고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을 때 할머니 한분께서 나를 부르며 하신 말씀이다.
“그런 것은 미안해하지 마시고 언제든지 저를 주세요!” “그란디 세금 고지서가 우리 집에 있는디 으짜까?” “그러면 지금 가져오세요!” “아이고! 바쁜 양반이 나를 지달리고 있으문 쓰간디! 그냥 내일 만나서 주께!” “내일요? 내일 제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기다리시게요?” “내가 여그서 지달리고 있으문 되제~에!” “내일 하루 종일 저를 기다리신다는 말씀이세요? 그러지 마시고 제가 저쪽 농장(農場)에 다녀와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댁에 가서 가져오셔도 되요! 그래도 할머니가 더 빠르실 거예요!” “농장에 댕겨 온다고 알았어! 그라문 내가 얼렁 가서 갖고 오께!”하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돌아왔는데 할머니께서는 벌써 집에 다녀와 고지서 두장을 나에게 내밀었다. “아제! 그란디 이것이 무슨 고지서여?” “재산세 고지서 독촉장이네요!” “그라문 두개 합쳐 을마나 나왔어?” “4만 8천 2백 2십 원이네요!” “그래~에! 우리 영감이 안 아프고 성성했을 때는 다 알아서 그것도 바치고 그랬는디
인자 몸이 안 좋아 집에 누워있응께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어르신이 많이 편찮으세요? 엊그제 제가 뵌 것 같은데 어디가 그렇게 안 좋으세요?” “엊그저께가 아니고 벌써 두 달이 넘었어! 그란디 요새는 치매까지 와서 나까지 꼼짝을 못하고 영감 옆에 있을랑께 참말로 힘드네!” “엊그제 소포 왔을 때 집에서 뵈니까 건강하게 보이시던데 그랬어요?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 “치매가 오문 어쩔 때는 멀쩡하다가 또 엉뚱한 짓거리를 해 싼께 그것이 꺽정이여!”
“그러게요! 사람이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살다 가면 좋은데 그렇게 되지 않으니 할머니께서 정말 힘드시겠네요!” “그래도 우리 영감인디 으짜껏이여! 그냥 그런대로 살아야제!” “할머니 그런데 이 고지서는 납기일이 넘어 면사무소에서 재발급을 받아야 납부할 수 있으니까 지금 영수증을 해 드릴 수 없거든요. 내일 잔돈하고 영수증 집으로 갖다드릴게요!” “알았어! 심바람 해 준 것도 고마운디 영수증까지 주라고 하것어!” “그럼 저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하고
막 빨간 오토바이에 올랐는데 갑자기 할머니께서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심각한 얼굴로 “아제! 그란디 나 뭣을 잔 물어봐야 쓰것네!”하셨다. “무엇이 궁금하신데요?” “아제는 여그저그 댕겨본께 번지(番地)를 잘 알제 잉!” “집배원이 번지를 모르면 어떻게 우편물을 배달할 수 있겠어요?” “그라문 금방 고지서 중에서 내 앞으로 나온 세금 안 있어? 그 땅이 으디가 있는지 알 수 있으까?” “할머니 앞으로 나온 세금 말씀이세요? 그 세금은 밭(田)이 할머니 앞으로 되어있던 것 같던데요!”
“그란디 그 땅이 으디가 있는지 아냐고?” “그건 저도 잘 몰라요!” “아니 금방 번지를 다 안다고 해 놓고 왜 몰라?” “저는 집 번지만 알 뿐 논이나 밭 번지는 모르거든요.” “으째 몰라?” “제가 편지를 배달할 때는 집으로 배달하지 논이나 밭으로 배달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니까 모를 수밖에요!” “그래~에! 나는 내 앞으로 된 땅이 으디가 있는지 몰라서 혹시 아제는 알고 있는가 싶어 물어봤어!” “그것은 나중에 아드님에게 물어보세요! 아드님은 아마 알고 계실 거예요!”
아직도 나무에 주렁 주렁 매달려 있는 이 열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목화 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