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가야 할 사람
11월로 접어들면서 거리에 서있는 은행나무 잎들이 점점 더 짙은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다 어젯밤 내렸던 찬 서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잎 두잎 떨어져 내리더니 어느새 길바닥에 수북이 쌓여 바람 곁에 흩날리고 있는데 엊그제까지도 벼를 베어내느라 바쁘기만 하던 시골 들녘에서는 찬바람이 불면서 시작되는 김장철을 앞두고 본격적인 수확을 앞 둔 쪽파 밭에 스프링클러를 이용하여 물 뿌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오늘도 시골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러 가는 길.
내가 전남 보성 회천면 영천리 도강마을에 접어들었을 때 오후 4시가 넘어서면서 늦가을의 짧은 해는 서산을 향하여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데 마을의 첫 번째 골목 끝 집 마당에 빨간 오토바이를 세우고 "할머니 어디계세요?" 하고 큰소리로 부르자 "나~아! 여깃어!" 하며 할머니가 집 아래쪽 밭에서 반쯤 굽어버린 허리를 세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머리가 땅에 닿을 듯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달려오고 계셨다. "할머니! 그러다 넘어지면 큰일 나니까 천천히 오세요!"
"아이고! 사람이 죽을 데가 아퍼야 죽는 것인디 죽을 데는 안 아프고 다른 데가 아픈께 이라고 걸어 댕기기도 힘드네!" "오늘은 인천에서 돈이 왔네요!" "엊저녁에 우리 막내며느리가 전화했드만 용돈 쪼깐 보냈응께 잘 쓰라고! 그래서 아저씨 지달리니라고 멀리 나가도 못하고 아래 밭에서 콩대 다듬고 있다가 아저씨가 지나가길래 불렇는디 몰르고 그냥 집으로 들어가 부네!" "그랬어요? 오토바이 소리에 잘 안 들리거든요. 오늘은 십 만원이 왔네요! 그런데 이 돈 어디에 쓰실 생각이세요?"
"으따 쓰기는 가용(家用)해야제! 그란디 나는 으째 이라고 허리하고 다리가 아퍼싼가 몰르것네!" "일을 하지 않고 집에 가만히 계시면 괜찮으실 텐데 자꾸 일을 하시니 그렇게 아플 수밖에요! 할머니 용돈도 오고했으니 회령리 장터에 있는 보건진료소(保健診療所)에 가셔서 물리치료를 받으시면 어떨까요? 진료소에서 받는 치료는 돈도 받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란디 거기 갈라문 걸어서는 못간께 차비(車費)를 들여야 되야! 가는데 천원. 오는데 천원. 그라고 물리치료 받는디
한참이 걸리드만 그라문 다른 일을 못한께 가기가 싫어! 옛날에는 걸어서도 잘도 댕기고 했는디 인자는 걸어서는 만날 못가것드만!" "그래도 몸 아픈 것 보다 치료를 받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란디 물리치료 받고 나문 한 3일은 괜찮다가 다시 아프드랑께! 우리 동생들은 이라고 고생 안하고 죽을 때가 된께 저승사자들이 잘도 데려가드니 우째 나는 안 데려가고 이라고 놔두고 있는가? 몰라!"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나~아? 올해 8십 일곱 살이여!" "그러면 동생들은 몇 살에 돌아가셨는데요?"
"우리가 5남매여! 그란디 내 바로 밑에 남동생은 8십 세 살에 죽고 그 아래 동생은 7십 살에 죽어 불데!" "칠십 세에 돌아가셨으면 너무 빠른데요." "그렁께 말이여! 그래도 사자가 데려간디 할 수 업제! 그라고 동생 한나는 칠십 일곱에 죽었어! 그란디 나는 아직도 안 죽고 있응께 큰일이여!" "그러면 위로 오빠가 계시나요?" "언니가 있어! 쩌그 건너 동네 김영순이 안 있어?" "TV 소리 크게 틀어놓고 계시는 할머니 말씀이세요? 아까도 대문 앞에서 콩 껍질 까고 계시던데요."
"아이고! 90살이 넘은 늙은이가 일을 을마나 하껏이여! 가만이 있으문 심심한께 뭣이라도 할라고 그라것제! 그란디 귀가 먹어갖고 소리가 안 들린께 그라고 텔레비를 크게 틀어놓고 살아! 그 언니가 9십 세 살인디 언니도 그라고 나도 그라고 얼른 데려가문 좋것는디 그것이 힘이 드네!" "그래도 할머니는 언니라도 계시니 좋으시겠네요!" "그란디 카만이 생각해 본께 나 보다 더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이 우리 언니 같은디 누가 먼저 죽을랑가 몰르것네! 언니가 먼저 가고 내가 가문 참말로 좋것는디!"
"우리 언니가 먼저 가고 내가 가문 참말로 좋것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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