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이야기

딸과 선풍기

큰가방 2011. 7. 2. 18:31

딸과 선풍기

 

진작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제주도 쪽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는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있었으나 이곳 보성에는 내리지 않아 장마철이라는 느낌을 별로 받지 않았는데 오늘 이른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우편물을 정리하여 우체국 문을 나설 때만 해도 억수 같은 장대비로 변하여 퍼붓는가 싶더니 다행스럽게 부피가 큰 택배를 배달할 무렵이 되면서부터 이슬비로 변하더니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다. “하늘에서도 집배원 사정을 잘 아시나 보다! 택배를 배달하려는데 비가 그치는 것을 보니!”하며

 

‘선풍기’라고 인쇄된 조금 큰 택배 박스 하나를 빨간 오토바이 적재함에 싣고 전남 회천면 회령리 삼장 아랫마을 가운데쯤 살고 있는 할머니 댁 마당으로 들어가‘빵! 빵!’소리를 내자 “누구여? 누가 왔어?”대답은 들리는데 사람을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 어디계세요?” “나~아? 여깃어! 거그서 쪼끄만 지달려 잉!”하며 집 위쪽 밭에서 옷에 흙투성이가 되어 부리나케 내려오신다. “오늘은 비가 오는데 이런 날이나 하루 쉬시지 밭에서 일을 하고 계세요?”

 

“엊그저께 밭에 감자 캐내고 콩을 잔 심것는디 풀들이 말도 못하게 질어싸서 그것 잔 닦달하니라고! 그라고 집이서 혼자 있을라문 무담시 심심하고 그랑께 이런 것이라도 하고 있으문 시간가는 지도 몰르고 좋아!” “이런 날 밭에서 일하시려면 힘들지 않으세요?” “그래도 햇볕이 쨍쨍 비치는 날 보다 더 시원한께 괜찬해! 그라고 풀도 잘 뽑아지고 그란디 뭣을 갖고 왔간디 사람을 불러싸?” “택배가 왔네요! 누가 선풍기 보냈다는 전화 없었나요?” “우리 딸이 선풍기 한 개 사서 보냈다고

 

전화했드만 그것인 갑구만!” “그러면 아직까지 선풍기도 없이 사셨단 말씀이세요?” “우추고 선풍기 한개도 읍시 날씨가 이라고 더운디 사람이 살것어? 근디 그것이 조깐 오래 되었는가 으짠가 자꼬 고장이 나드란께 그래갖고 엊그저께 우리 딸이 와서 보드니 ‘엄마! 선풍기 못 쓰것네! 그란께 내가 한나 사서 보내주껏잉께 고장 난 것은 전부다 고물장사 줘 불소!’하고 가드니 이라고 보냈는갑구만!” “할머니는 좋으시겠네요. 이렇게 선풍기를 사서 보내주는 따님도 있으니!”

 

“늙은이 혼자 살아도 있어야 쓸 것은 다 있어야 된께 그것도 성가시네!” “사람은 혼자 있으나 열 명 있으나 필요한 것은 다 똑 같아요. 그럼 저 그만 가 볼게요.”하며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윗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고 내려오면서 대문 앞을 지나치는데 얼핏 보기에 할머니께서 선풍기 부품을 꺼내 놓고 계신 것이 보였다. “참! 내 정신 좀 봐라! 할머니께서 선풍기 조립을 하지 못하실 텐데 그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박스만 내려놓고 왔으니 지금 많이 답답해하시겠지?”하며 다시 마당으로 들어가

 

“할머니 뭐하고 계세요?”하였더니 “아이고! 아제 마침 잘 왔네! 이것을 끄집어 내놓고 본께 우추고 해야 될지 몰라 지금 꺽정하고 있는디 이것 할지 알아?” “그렇지 않아도 아까 선풍기 배달하면서 조립해드리고 가야 하는데 그것을 깜박했어요.” “그랬어? 써글 것이 이른 것을 보낼라문 늙은이가 그냥 쓰것게 해서 보내야제 이라고 다 풀어져분 것을 보내문 내가 우추고 해서 쓰껏이여?” “가전제품은 원래 이렇게 공장에서 출하되고 있거든요. 그리고 도시에서는 서비스 기사들이

 

배달하면서 조립해 주는데 여기는 시골이니까 그 사람들이 올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웬만한 물건은 무엇이든 택배로 발송하니까 시골의 노인들께서는 조금 불편하실 거예요!” “그라문 지가 갖고 오든지 하제 무담시 바쁜 양반을 성가시게 해서 미안해서 으짜까?” “괜찮아요. 그런데 선풍기 색깔이 참 예쁘네요. 이제 선풍기 틀어놓고 계시면 한 여름에도 무더위 없이 시원하게 보내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따님에게 선풍기 보내줘서 고맙다고 하세요!”

  

"이것을 우추고 해야 되야?"

"인자 되얐구만 무담시 바쁜 양반 성가시게 해서 미안해서 으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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