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이름
12월로 접어들었음에도 전혀 추워질 것 같지 않던 날씨가 두 번째 주가 가까워지자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집어 삼킬 듯 강풍(强風)이 불어오며 차가운 날씨로 변하면서 하늘에 짙은 먹구름을 넓게 펼쳐놓기 시작하더니 이슬비가 내렸다. 소나기가가 쏟아지다. 어느새 하얀 눈으로 변하여 내리기 시작하는데 시골마을로 길게 이어지는 농로(農路)길 옆 밭에는 오늘도 많은 아낙네들이 차가운 추위 속에서도 밭 한쪽에 나무를 모아 조그만 모닥불을 피워놓고 쪽파 수확에 여념이 없는데
강한 바람에 나뭇잎을 모두 빼앗긴 길가의 가로수들은 '휘~위~윙!' 칼바람 소리를 내며 오들오들 떨고 서 있었다. 오늘도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시골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러 가는 길. 전남 보성 회천면 전일리 군학(群鶴)마을에서 수취인을 알 수 없는 청첩장 주인을 찾으려고 마을 사람에게 문의하려는데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옛날 시골에서는 벼 수확이 끝나면 농한기라고 하여 할 일이 따로 없었는데 요즘은 쪽파 수확 때문에 오히려 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으니 이제는 농한기가 없어진 것 같다!' 는
생각을 하는데 마침 바쁘게 지나가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나 "할머니! 혹시 이 마을에 강기영씨라고 아시겠어요?" 물었더니 "강기영? 나는 첨 듣는 이름인디 잘 모르것네! 쩌그 강씨 집이 가서 물어봐! 그 집인지 모른께!" 하며 무엇이 그렇게 바쁘신지 부산하게 발걸음을 재촉하신다. 그리고 잠시 후 강씨 영감님을 만나 “어르신 혹시 강기영씨라고 들어보셨나요?” 하고 물었더니 “강기영이라고? 나는 첨 듣는 이름인디 강기영이가 누구까?”하셨다. “이 마을에 강씨(姜氏)는 두 집 밖에 없지요?”
“잉! 그란디 저쪽 집은 아니여! 거그는 우리 동생인디 내가 모르것는가?” “그러면 혹시 이 마을 여자(女子) 분께서 그런 이름을 갖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요?” “금메! 내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것제만 여자들도 그런 이름은 없는 것 같든디 그 사람이 누구까? 으디서 한번 들어본 것 같기도 한디 생각이 안 나네!” “그러면 혹시 어르신 조카들 이름은 아닌가요?” “우리 조카들? 내가 아무리 나이를 묵었어도 내 조카 이름조차 기억을 못 한단가? 그란디 내가 으디서 꼭 한번 들어본 상당히
낯익은 이름 같은디 이상하네! 그나저나 나는 잘 모르것응께 이 마을 이장한테 가서 물어보소! 나는 몰라도 이장을 알고 있것제!” “예! 잘 알았습니다. 바쁘신데 괜히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뭣이 죄송하단가!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제!”하더니 또 어디론가 부산하게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리고 잠시 후 마을의 이장님을 만났는데 “강기영이라고? 강기영이라는 사람은 이 마을에 없는데 무슨 청첩장을 이렇게 보냈으까?” “그러면 혹시 여자 분은 안 계시나요?”
“이 마을에는 강씨 성을 가진 여자 분은 없어요! 저기 아랫집 강씨 어르신에게는 물어보셨나요?” “방금 만나 물어보았는데 잘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내 생각으로는 강영윤 씨가 맞을 것 같은데!”하는 사이“어이! 금방 그 청첩장 으디서 온 것인가?”하며 강씨 영감님께서 이장 댁 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동율리 동촌(桐村)마을에서 보냈네요!” “동촌마을 누가 보낸 것이여?” “강정기씨가 보내셨는데요!” “그랫어? 그라문 이리 한번 줘보소!”하며 청첩장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영감님 빙긋이 웃으며 “이것이 내 것 인갑네!”하신다. “아까는 아니라고 하시더니 왜 어르신 것이라고 하세요?” “동촌에 강정기가 내 육촌 형님이거든 그리고 내 족보 이름이 강영기여! 그란디 형님이 이름을 쓰면서 강기영이라고 순서를 바꿔 잘못 썻는 갑구만! 아이고! 형님도 청첩장을 보낼라문 이름을 잘 써서 보내야 배달하는 사람 고생을 안 시키제! 강영기를 강기영이라고 써 논께 나도 내 이름을 모르것드란 말이시!”
아직도 전남 보성 회천면에서는 쪽파 수확이 한창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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