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이름
어제까지 맑고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늘은 강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여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금년에는 유난히 오래 계속되는 것 같지만 들녘에 밭을 고르는 트랙터의 힘찬 엔진 소리가 봄이 우리 곁에 찾아왔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하여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전남 보성 회천면 화죽리 지등마을에 들어서자 마을 어귀 담장 옆에 빨간 철쭉꽃이 탐스럽게 피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아무리 겨울이 떠나기 싫어 발버둥을 치며
우리 곁에 머물고 싶어 하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봄이 찾아와 꽃을 피워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지등마을의 네 번째 집 마당에 빨간 오토바이를 세우고 약(藥)으로 보이는 어른의 주먹만 한 크기의 택배 하나를 가지고 현관 앞에서“계세요?” 하고 부르자 “누구요? 우리 아들은 으디 가고 나만 있는디 으째 그라요?”하며 이제 80세가 훨씬 넘은 할머니께서 현관문을 열고 대답하셨다. “아드님은 어디 가셨나요?” “차가 없는 것 본께 우리 며느리랑 밭에 갔는가 어쨌는가 안보이구만 그란디 으째 그래?”
“약이 왔나 봐요! 할머니 댁에 누가 편찮으세요?” “야~악? 내 약이 왔는 갑구만!” “그런데 이건 택배라서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뭐시라고? 성이 으짠다고?” “이름이 어떻게 되시냐고요?” “내 이름? 가만있어 그랑께 옛날에 나를 불렀든 이름말이제?” “예! 할머니 이름이요!” “금메! 생각이 안난디 으짜까?” “그러세요? 그럼 이약은 무슨 약인가요?” “그 야~악! 지금 여가 우리 큰 아들집이요! 그란디 먼자 참에 쩌~어그 인천 우리 작은 아들집이서
내가 몸이 안 좋아 병원서 약을 갖다 묵고 있다가 이리 왔어! 그랑께 우리 작은 아들이 다달이 나한테 약을 보내고 있는디 그 약이 왔는 갑구만! 내가 먼자 참에 마당에 넘어져 다리를 다쳤어! 그래서 한 보름동안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어저께 퇴원했는디 우리 큰며느리가 아침에 목욕탕에 물을 받아놓고 나 목욕을 시키데 그라고 속옷 갈아입으라고 그래서 속옷을 갈아입고 잠이 와서 한숨 자고 난께 둘이 쩌 위에 밭에 갔는가 으쨌는가 암도 없단께!”
“그러면 할머니 성(姓)은 어떻게 되세요?” “나는 박(朴)가여!” “그런데 할머니 이름은 아직 생각 안 나세요?” “금메 나도 이름이 있었는디 생각이 잘 안 난단께! 그란디 으째서 자꾸 늙은이 이름은 물어싸~아?” “여기 할머니 성함을 적어야 하거든요!” “그래에? 그란디 내가 발을 잘 못 쓴께 아들한테 갈수도 없고 으째야 쓰까? 우리 큰아들이 촌에 살아도 나한테 잘한단 말이요! 그라고 우리 며느리도 영 나한테 잘해! 그란디 오늘은 바람 불고 추운께 나를 집에 놔두고 밭에 갔는 갑구만!”
“할머니! 그럼 어디 놀러 가실 곳은 없으세요?” “으째 없간디 저위에 회관이 있는디 내가 걸음발을 잘못한께 회관까지 못 걸어가! 딴 때는 아들이 차로 데려다 주고 그란디 오늘은 아들이 어디가고 없어서 혼자 집에 이라고 있제~에!” “할머니! 다리가 편찮으시면 서 계시지 마시고 앉으세요!” “아이고! 안되야! 손님 세워놓고 나만 앉으문 되간디?” “그건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앉아계세요!” “근디 내 이름이 뭣이냐고 물어 봤제~에!” “예! 혹시 생각나셨어요?”
“인자 생각해 본께 내 이름이 수남이여! 박수남이!”하고 대답하시더니 할머니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이름을 생각해 내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얼굴이 붉어지신다. 시골마을로 우편물을 배달하다 보면 가끔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사는 할머니들을 만나게 되는데 결혼하고 나면 지금까지 사용하던 이름대신 친정 마을 이름을 딴 댁호(宅呼)를 사용하다보니 자연 이름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가끔 할머니들의 이름을 한번 씩 불러주는 것은 어떨까?
봄은 언제나 우리에게 아름다운 꽃을 선물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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