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자전거

"누님이라 부를까요?"

큰가방 2006. 9. 20. 23:12
 

“누님이라 부를까요?”


9월 중순이 가까워지자 약간 따가운 햇살과 함께 푸른 하늘은 어제 보다 조금 더 높아지면서 가을이 한층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껴봅니다, 오늘도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하여 언제나 저와 함께하는 빨간 오토바이 적재함에 사랑과 행복이 담긴 우편물을 가득 싣고 시골마을을 향하여 출발합니다, 시골마을로 향하는 도로 주변에 조금 일찍 피어난 붉은색 코스모스 한 송이가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거리고 있는데 멀리 보이는 밭에서는 오늘도 많은 아낙네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금년 겨울 김장 때 사용할 쪽파의 씨를 파종하는 작업이 한창이며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공터에는 기다란 비닐 자리를 깔아놓고 이미 밭에서 거둬들인 콩이며 고추며 참깨 대를 넓게 펴서 말리고 있습니다, “오늘이 이슬이 깨인다는 백로(白露)라더니 벌써부터 농작물을 수확하고 있으니 정말 절기(節氣)는 속일 수 없구나!”라는 것을 느끼며 제가 도착한 곳은 전남 보성 회천면 군농리 화동마을입니다, 화동마을에서 일반우편물 배달을 거의 끝날 즈음 현금 등기 우편물을 배달하려고


회관 앞 쪽으로 다가서고 있는데 오늘은 마을의 할머니 몇 분이 나무그늘에 앉아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지 “헛! 헛! 허! 허!”웃다가 저를 보더니 “아제! 오늘은 뭔 좋은 소식을 갖고 왔어?”하며 반기십니다, “오늘은 별 다른 소식이 없네요! 그런데 유길준 할머니 어디계세요?”하였더니 “왜? 우리 아들을 찾어?” “할머니 댁에 등기편지가 왔거든요, 그러니까 얼른 할머니 댁에 가보시게요!” “등기가 있으문 그냥 이리주고 가제! 으째 집으로 가자 그래싸?” “글쎄! 그런 일이 있어요,”


“그래~에! 그라문 어서 가 봐야제!”하시며 할머니께서는 부리나케 집으로 향하십니다, “할머니! 다름이 아니고 멀리 충주에서 아드님에게 현금이 들어있는 등기를 보내왔거든요! 그래서 아드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야 되기 때문에 집으로 오시자고 했어요,” “그래~에! 그란디 충주 누구한테 돈이 왔으까?” “황길수 씨라는 분이 현금 2십 5만원을 보내셨네요! 여기 돈이 맞는지 한번 세어보세요!” “와따~아! 첨 보것네! 오죽 잘해 갖고 왔으껏이여! 돈은 잘 맞것제! 그란디 황길수? 황길수가 누구까? 나는 모르는 사람인디!”


“그래요? 그래도 일단 아드님 이름으로 돈이 왔으니까 할머니께서 받아놓으셨다 아드님에게 전해드리세요!” “금메! 우리 아들 이름으로 돈이 왔응께 받기는 받는디 누구까? 돈이 2십 5만원이나 된디!”하더니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이 났는지 할머니께서는“참! 그렇제! 그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니고 조상님 산소 벌초해 주라고 돈을 보냈는 갑구만 아까 이름이 황길수 라고 그랬제?”하고 물으십니다, “예! 황길수 씨요!” “잉! 그 사람이 우리 먼 일가(一家)친척이 되는 사람인디 여가 자기네 조상님 산소가 있어!


그래서 해마다 우리 아들이 그 사람들 산소에 벌초를 해 준디 올해도 벌초 해 주라고 돈을 보냈는 갑구만!” “그랬어요? 그런데 산소가 몇 봉(峯)이나 되는데요?” “산소도 여기저기 많어! 가만있어라~아! 한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산소도 하다 많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응께 나는 잘 모른디 다섯 봉산(蓬山)이나 되는 갑구만!” “산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 벌초하기가 힘들겠는데요?” “나는 몰라! 벌초는 우리 아들이 다 알아서 하고 다닌께! 이 돈도 잘 놔뒀다가 우리 아들 오면 줘야제! 그나저나 으짜까?


뭣 대접할 것도 없는디?” “할머니도 참! 무슨 대접은 대접이에요? 할머니! 저 그만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하며 제가 막 빨간 오토바이에 올라타려는 순간 갑자기 할머니께서 “아제! 나 좀 봐!”하시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내가 참말로 할머니 같이 보여?”하고 물으십니다, 할머니의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한 제가 “아니? 왜? 그러시는데요?”하였더니 “나는 별로 나이도 안 묵었는디 나보고 할머니라고 그런께 내가 참말로 할머니 같이 보인가 싶어서!”하셔서“할머니! 그게 아니고요!”


하는 순간 “또 할머니라고 그런다! 나는 아직 할머니가 아니란께!”하시며 무척 화가 난듯한 표정을 지으십니다, “그러면 누구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아짐(아주머니)? 그렇지 않으면 누님? 이라고 부르면 어떻겠어요?”“아짐도 좋고 누님도 좋아! 그랑께 할머니라고 만 부르지 말어! 잉! 알았제!”“알았어요! 누님! 누님이 좋겠네요!” “누님이라고 불러주면 더 좋제~에!”하시는 할머니께서는 어느새 마음이 훨씬 젊어지신 듯 활짝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아직도 시골 마을 어느 집 울 밑에는 봉선화가 피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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