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자전거

아름다운 연인(戀人)

큰가방 2004. 2. 4. 19:12

아침 10시경 보성우체국 우편실에 70살이 넘어 보이시는 할머니 한 분과 초등학교 3학년
쯤으로 보이는 남자 어린이가 손을 잡고 들어오더니 누구를 찾는지 두리번거립니다. 그래서
제가 "할머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하고 물었더니 할머니께서는 "거시기 우리 아들이 서울
서 무슨 물갠을 보냈다고 한디 으디로 보낸지를 몰라서 혹시 우체국으로 보냈는가 싶어서
와 봤단 말이요! 혹시 우리 집이 뭣이 안 왔으께라우?" 하고 물으십니다. "할머니 댁이 어
디신데요?" 하고 제가 묻자 할머니께서는 "우리 집은 미력 망골이고 내가 살기는 저기 떡방
앗간 뒤에서 산단 말이요!" 하십니다.

 

"할머니 떡방아간이 어느 쪽 떡방아간인데요? 보성에 떡방아간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그렇
게 말씀하시면 저희들이 잘 모르거든요!" 하였더니 할머니께서는 "쩌그 군청 위로 쭉 올라
가문 참지름도 짜고 한 방앗간이 안 있습디여 거그 떡 방앗간 뒤에서 산단 말이요!" 하십니
다. "할머니 그러면 소포를 언제 보냈다고 하시던가요?" 하고 제가 다시 물었더니 할머니께
서는 "그저께 보냈다고 그라드만!" 하십니다. "할머니 그제 아드님께서 소포를 미력으로 보
냈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보성으로 보냈다고 하시던가요?" 하였더니 할머니께서는

 

"금메 그
것을 잘 몰르것당께 우리 아들이 그냥 엄니 계신디로 보낼랑께 그리아시요 잉!"

하드란 말이요!" 하십니다. 그래서 "할머니 그러면 아드님께서 소포를 할머니에게 보낸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할머니 가족에게 보낸다고 하던가요?" 하고 물었더니 "금메 그냥 식구들
앞으로 보냈다고 그라데 그랑께 혹시 왔을랑가 몰른께 한번 찾아보시요 잉!" 하십니다. 그
래서 보성군청 쪽의 집배 담당하시는 분에게 물었더니 "오늘은 소포 도착한 것이 없는데!"
하는 대답입니다. 그래서 다시 미력면 망골 쪽의 집배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물었으나 할머
니의 소포는 역시 도착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할머니 오늘은 할머니에게 소포가
도착된 것이 없는 것 같네요! 혹시 아드님 전화번호를 가지고 계세요?

 

아드님 전화번호가 있으면 아드님에게 전화를 해보면 소포를 누구에게 보냈는지 알 것 같은
데요!" 하였더니 할머니께서는 "금메 우리 아들 전화번호를 모른단 말이요!" 하시며 매우
실망하신 듯한 표정이십니다. 그런데 그때 바로 옆에서 눈을 말똥거리며 서있던 할머니의
손자가 갑자기 "아저씨 우리 엄마가요! 선경희 씨예요!" 하는 겁니다. 그때서야 "아! 참!
그렇지 우체국 사서함에 소포가 보관된 게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할머니! 할머니
따님이 선경희 씨가 맞아요?" 하고 물었더니 할머니께서는 좀 전이 실망스런 얼굴이 갑자기
밝은 얼굴로 바뀌면서 "예! 우리 딸이 선경희 요!" 하십니다.

 

그래서 남자 어린이에게 "그럼 네가 조금 빨리 엄마 이름을 말하지 그랬니?" 하였더니 남자
어린이가 하는 말 "아저씨가 저에게 우리 엄마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합니다. "참!
내가 그랬구나!" 하고서는 사서함 우편물만 보관하는 곳에서 라면 상자 만한 소포 한 개를
꺼내어 할머니께 드리면서 "할머니! 따님의 이름을 말씀하셨으면 소포를 쉽게 찾았을 텐데
그랬네요!" 하였더니 할머니께서는 "늙은이가 뭣을 알아야제!" 하시며 소포를 가지고 집으
로 돌아가십니다. 할머니께서 집으로 돌아가신 후에 저는 다시 오늘 배달할 우편물을 정리
하여 우체국 문을 나섭니다.

 

거리에는 지난번 설 때 몰아쳤던 강한 추위가 풀려서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음인지 사
람들의 모습이 활기가 넘쳐 보입니다. 저는 보성초등학교의 우편물 배달을 마치고 보성남초
등학교를 향하여 천천히 가고 있는데 멀리 보성남초등학교의 정문 앞 부근에서 위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술에 몹시 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남자의 팔에 이끌려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 지금 시간이 낮 12시도 되지 않았는데 왠 술이 저렇게 많이 취하여 남자에
게 끌려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남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갑니다.

 

그런데 술에 취한 듯한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저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습니다. 위
아래 검은 옷을 입은 여자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뇌성마비 장애인 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서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남자가 오른손은 여자의 허리에 왼손은
여자의 아랫배에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여자는 오른 손으로 남자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려
고 하는데 몸을 잘 가눌 수가 없기 때문에 멀리서 보기에 여자가 마치 술에 몹시 취한 것으
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무엇인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듯 웃는 얼굴로 남
자는 여자의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걷고 있었으나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가 "헝님! 수고하심다!" 하고 인사를 하기에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남자는 저의 후배인데 오른 쪽 다리가 약간 불편하고 또 말을 약간 더
듬으며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장애인이지만 그러나 공사판에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언제
나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맞이하는 이제 나이 40살이 가까운 예의바른 성실한 청년인데 두
사람의 옷차림을 자세히 보니 아가씨는 위아래 검은색 원피스로 정장을 하고 머리에는 검은
색으로 청년은 감청색 양복을 입고 머리에는 요즘 젊은이들이 유행하는 약간 붉으스름 한
색으로 코팅까지 하고

 

정답게 걷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후배
가 아가씨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자 아가씨가 저를 보더니 수줍은 듯한 미소로 가볍게 목례
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예! 안녕하십니까?" 하고 답례를 하고는 보성 남초등학교 교정으
로 들어가면서 생각을 하여봅니다.  두 사람의 몸은 비록 장애인일지라도 마음은 어느

정상인 못지 않은 아름다운 연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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