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지락 거리기

아직도 하지 못한 말

큰가방 2017. 4. 2. 08:49

아직도 하지 못한 말

 

입춘(立春)이 되자마자 봄이 시작되려는 듯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그것도 잠시 또다시 겨울이 심술(心術)을 부리려는지

어제의 포근한 날씨와 다르게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고 있지만, 산비탈 양지쪽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만 잡초들은 파릇파릇 싹을 내놓더니

 

어느새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TV를 시청하는데 사회자가 출연자에게 물었다. “형사(刑事)생활을 몇 년이나 하셨습니까?” “32년 했습니다.”

그러면 계속 강력계(强力係)에서만 근무하셨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면 선생님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어떤 사건입니까?”

 

아마 여러분께서도 다 잘 아실 것인데 화성 연쇄 살인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세계 백대 살인사건 중 하나로 들어갈 만큼

큰 사건이지만 아직도 범인을 잡지 못해 영구미제로 남아 있는데 지금이라도 그 범인을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습니다.”하며

 

볼펜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고 저기 죄송한데요. 볼펜을 조금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사회자의 말에 깜짝 놀란 얼굴로미안합니다.

이게 습관이 돼서요.” “슬하에 자녀는 어떻게 되십니까?” “딸만 하나있습니다. 바빠서요.” “바빠서 자녀를 한분만 두셨군요.”

 

! 그런데 그 애가 내년에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특별히 무슨 선물 같은 것도 준비하셨나요?” “특별히 준비한 것은 없고

그냥 그때 읽어줄 편지를 한 장 쓰고 있는데 그게 상당히 힘드네요.” “그러면 여기서 미리 영상편지 한 장 써 주실 수 없을까요?”

 

아직 아무 준비도 안했는데!”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간단하게 하시면 됩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에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잘 살아라! 부디 잘살아라!”하는 출연자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재작년 나의 정년퇴직(停年退職) 때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지난 197712월 나는 전남 신안 안좌우체국으로

첫 발령을 받아 근무하다 고향인 보성우체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과 강산이 몇 번이 바뀌는 세월이 흐르면서 드디어

 

나도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는데, 퇴임식장에서 할 말을 연습하기 시작하였다. ‘제가 처음 집배원을 시작하였을 때,

그때는 저에게 정년퇴직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저도 어느덧 나이가 들고 드디어

 

여러분의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과 함께했던 지난 세월은 저에게는 커다란 즐거움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값진 행복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멋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정말 그 무엇과도 바꿀 없는 제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 곁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여기남아 늘 여러분을 응원할 것입니다. 그동안 혹시 제가 여러분에게 서운하게 하였거나

제게 대한 나쁜 기억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잊어주시고 저의 대한 좋은 추억(追憶)만 간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라고

 

수없이 연습을 하고 또 하였다. 그리고 퇴임식장에서 오늘 퇴임하시는 류상진 팀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 나는 연단에서 여러 직원들을 둘러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복 바쳐 오르면서

 

눈물이 핑 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습했던 내용은 모두 다 잊어버리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채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그 말만 간신히 하고 말았을 뿐이다.


"아빠~아! 꼭 잡으란 말이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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