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이야기

점심식사 소동(?)

큰가방 2003. 12. 14. 09:42
12월의 중순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눈이라고 해서 그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은 아니고 땅에 닿자마자 금방 녹아버리는 눈이
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겨울인가?" 하는 마음이 들면서 "이제부터는 연말연시가 시작되
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도로의 가로수는 이제 깊은 겨울잠에 빠졌는지 지나가는 바
람을 맞으며 윙윙 소리만 내고 있을 뿐 아무런 기척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부지런히 움직이다보니 전남 보성읍 옥평리 두슬 마을
에 도착하였습니다. 두슬(頭瑟)마을은 마을의 위치가 풍수지리학상의 거문고의 머리부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의 이름입니다. 그 마을의 정해설 씨 댁으로 등기 우편물
한 통을 가지고 들어갑니다. 정해설 씨는 엊그제만 해도 한국통신 보성전화국에서 근무를
하시다 이제는 정년 퇴임을 하시고는 집에서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정해설 씨의 방문 앞에서 저는 큰소리로 "형님 계세요?" 하고 정해설 씨를 부르자 "엉 동생
오셨는가?" 하시며 저를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형님 한국통신에서 등기편지가 한 통 왔네
요!" 하는 저의 말에 정해설 씨는 "음 나도 알고 있었네 아마 내 퇴직금 때문에 왔을거여!
그란디 동생 점심식사는 하셨는가?" 하고 묻습니다. "예! 저기 봉산리 김장하는 집에서 한
그릇 얻어먹고 왔어요!" 하고 대답을 하자

정해설 씨께서는 "식사 안 했으면 식사하고 가시게 자네 좋아하는 라면도 있고 그랑께 말씀
만 하시소!" 하십니다. "정말 점심을 먹었다니까요! 왜 제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서요?" 하
자 "그러면 동생! 차라도 한잔하고 가야지 안 그런가? 모처럼 동생과 만났는데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 하면서 제가 방으로 들어갈 것을 권하십니다. "형님 그러면 따끈한 녹차 한잔
끊여주십시오!" 하고서는 잠시 마루에 앉아서 간간이 내리는 눈을 바라봅니다.

그러다 문득 이십 여 년 전의 일이 떠오릅니다. 그 시절만 해도 우편물을 자전거를 타고서
배달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날도 오늘처럼 등기우편물을 배달하려고 마당으로 들어와서
정해설 씨를 부르자 가족끼리 점심식사를 하시다가 정해설 씨가 급히 마루로 나오시더니 오
늘처럼 "동생 점심식사 안 하셨으면 식사 좀하고 가시게!" 하시기에 저는 아무런 생각도 없
이 "그러면 밥 한 그릇 주십시오!" 하고서는 전혀 사양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정해설 씨께서 가지고 나오신 것은 밥상이 아니고 어린애 주먹만한 잘 익은
홍시 세 개입니다. 그리고는 "어이 동생 우선 이것 드시고 잠시만 기다리소 잉!" 하시는 겁
니다. 저는 그때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요즘이야 가스렌지 니 전기밥
통이니 하는 것이 있어서 항상 따뜻한 한 밥을 먹을 수 있지만 그 시절만 해도 아침에 밥을
해서 아랫목에 묻어놓고 점심식사를 하던 시절이니 제가 먹을 여분의 밥이 없었던 것입니
다.

그런데 저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눈치 없이 점심을 얻어먹겠다고 방안에 앉아있으니 그 댁
에서는 저도 모르게 비상이 걸린 셈이지요 또 요즘처럼 가스렌지에 금방 밥을 지을 수도 없
는 시절이어서 연탄불이나 아니면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지어야 하는 시절이니 정해설
씨의 부인은 얼마나 당황하셨겠습니까? 그런다고 밥이 없으니 "저 그만 가 봐야하겠습니
다!" 하고 일어설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그냥 앉아있는데 정말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
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밥을 새로 지어 상을 보아 오시면서도 "어이 동생 시간을 너무 오래 빼
앗아서 미안해서 어쩌까?" 하시며 정말 미안해하시던 정해설 씨의 얼굴이 생각나서 저도 모
르게 빙그레 웃음을 웃고 있는데 녹차 찻잔을 들고 오시는 정해설 씨께서 저의 얼굴을 보시
더니 "동생 무슨 좋은 일 있는가? 왜 그렇게 싱글벙글 웃고 있는거여?" 하십니다. "아니요!
형님께서 이렇게 직접 녹차를 타다주시니 고마워서요!" 하면서 따끈한 녹차를 한 모금 씩
천천히 마셔봅니다.

그리고 잠시동안 쉬면서 지나간 옛날 이야기를 살며시 꺼내어 정해설 씨에게 들려주었습니
다. "아이고 이 사람이 아직도 그 일을 잊어버리지도 않고 있네 그려 그러고 보면 지금은
세상이 너무나 살기가 좋아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밥 한 그릇 하기도 힘이 들었던고!" 하
면서 빙그레 웃고 계시는 정해설 씨의 눈가의 깊은 주름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듯합
니다. 이제는 정년퇴임을 하시고 집에서 쉬고 계시는 정해설 씨가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빌
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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