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이야기

이 세상에는 없는 약

큰가방 2003. 12. 21. 08:43
엊그제부터 강한 바람과 함께 찾아온 추위는 오늘까지도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 밤에 내린 눈과 함께 아침까지 만 해도 꽁꽁 얼어붙었던 도로는 우편물을 배달
하러 우체국 문을 나설 때가 되자 햇볕에 모두 모두 녹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시골마을로 향하는 들판의 논과 밭에는 가끔씩 먹이를 찾는 까치 몇 마리만 이 논에
서 저 논으로 왔다 갔다 할 뿐 아직까지 녹지 않은 눈에 덮여 있어 조용하기만 합니다.

이미 비쩍 말라비틀어진 낙엽 몇 장이 강한 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나뒹굴다 도로의 한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았는지 부스럭 소리도 없이 조용히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여름 모
든 사람들이 따가운 햇볕을 피하도록 푸른색 녹색의 옷을 입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였던
도로의 가로수들은 그 많던 나뭇잎 옷을 이제는 모두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차가운 바람에
윙윙 소리를 내면서 추위에 떨고 서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이 마을 저 마을로 정다운 소식과 기쁜 소식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를 타고서
열심히 달리다 보니 어느덧 보성읍 대야리 유촌 마을에 도착하였습니다. 유촌 마을에서 우
편물 배달을 하다 문득 생각을 해보니 유촌 마을 맨 첫 집의 등기우편물 생각이 납니다.
“참! 맨 첫 집 할머니 댁에 등기 우편물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자 다시 오토바이를 돌
려서 할머니의 댁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댁 마당에 들어서서 “할머니! 할머니 계
세요!” 하고서 큰소리로 할머니를 부릅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응! 누구여? 누구왔어?" 하시며 방문을 열어보시더니 ”응 우체부 양반
이구만!“ 하시며 ”거시기 내 약이 왔제? 아침에 우리 딸한테서 전화가 왔드만 약 보냈응께
집이가 있다가 받으라고!“ 하시며 ”거시기 참! 도장이 있어야제 잉!“ 하시며 조그만 핸드백
을 꺼내어 열어보시고는 주섬주섬 도장을 찾으십니다. ”할머니 어디가 많이 편찮으세요!“
하고 제가 묻자 할머니께서는 도장을 찾다말고 오른손으로 할머니의 머리 뒤쪽을 가르치시
더니

“여가 뭔 바늘로 콕콕 쑤신 것 같이 아프고 머리가 멍하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 또 어짤
때는 이쪽에(왼쪽) 발가락부터 요짝 (왼쪽)손가락까지 절절절절하니 뭣이 꼭 땡긴 것 같이
막 아프기 시작하문 정신이 하나도 없당께 그래서 우리 딸한테 이야기를 했드만 광주 어디
약국에서 약을 지어다 묵으문 괜찬하다고 그란다고 약을 지여서 보내 주마고 그러드마는 먼
자 참에 약을 지어 갖고 보내줘서 그 약을 묵응께 그래서 그란가 쪼금씩 괜찬하데 그란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돈이 으디가 있어서 약을 늘 사서 보내라고 하기도 미안하고 그
래서

인자는 약을 끊어 볼라고 요새 약이 떨어졌어도 약 사보내란 소리를 안했드만 도로 또 아퍼
싸서 할수없이 딸 한테로 전화를 했제~에 그랬드만 어저께 약 보냈응께 오늘 집에 있다가
약을 받으라고 딸 한테서 전화가 왔드만!“ 하십니다. ”할머니 그러면 약을 계속해서 드셔야
지요 그러다 큰일나면 어떻게 하시려고 약을 끊으시려고 하셨어요?“ 하고 묻자 할머니께서
는 ”금메! 그라기는 그란디 날마다 약이 없으문 못산께 자식들한테도 미안하고 또 즈그들도
잘 살도 못한디 늘 약 사서 대란 소리도 못 하것고 그래서 약을 끊어 볼라고 그랬제!“ 하시
더니

할머니께서 갑자기 은근한 목소리로 “그란디 아저씨 노인들이 안 아프고 가만히 살다가 그
냥 때가 되문 조용하게 갈데로 갈 수 있는 약은 없으까?” 하고 묻습니다. “할머니 이 세상
에 그런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런 약이 있다면 제약회사나 의사 선생님들
은 모두 굶어죽게요?” 하였더니 할머니께서는 “대차 그라것네 잉! 그래도 그런 약이 있으문
우리같이 늙은이들 한테는 영 좋으껏인디 그런 약 어디 있는가 한번 알아봐 아저씨가 잉!
인자 나도 나이를 묵응께 젊은 시절은 전부 다 어디로 가불고 병만 남아갔고 있는 것 같아”

하시며 쓸쓸하게 웃으십니다. 정말 할머니의 말씀처럼 사람이 살아가면서 평생 아프지 않고
살다가 어느 날 돌아갈 때가 되면 조용하게 돌아갈 수 있는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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