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자전거

할머니의 6,25

큰가방 2008. 6. 29. 21:06
 

할머니와 6.25


“여보세요! 김서례 할머니 댁이지요?” “그란디 누구여?” “우체국 집배원입니다.” “오~오! 편지 배달 아제구만! 그란디 뭔 일이여?” “할머니께 택배가 하나 도착했거든요.” “그라문 얼렁 갖고 와 불제 뭣할라고 전화했어?” “지금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후 1시경에 할머니 댁에 배달해 드릴게요. 그리고 돈이 왔으니까 주민등록증을 찾아 놓으세요!” “잉? 돈이 을마나 왔간디 주민등록증을 찾으라고 그래싸?” “환(換)증서에 할머니 주민등록번호를 적어야 하니까 그래요. 아시겠지요?” “잉! 알았어!”


6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찾아온 장마 비는 어젯밤 늦은 시간부터 줄기차게 뿌려대더니 아직도 그칠 생각이 없는지 계속 내리다 오늘 배달할 우편물을 정리하여 빨간 오토바이 적재함에 가득 싣고 시골마을을 향하여 출발할 무렵부터 점차 가늘어지더니 구름 사이로 햇볕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배달할 우편물도 많은데 제발 비 좀  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남 보성 회천면 서당리 원서당 마을 김서례 할머니 댁 마당으로 들어갔더니 혼자 마루에 앉아 끄덕끄덕 졸고 계시던 할머니께서


오토바이 소리에‘화들짝’놀라“아이고! 아제 지달리다 눈 빠져 불것네!”하며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셨다. “아까 전화 받고 지금까지 저를 기다리고 계셨어요?”하며 빨간 오토바이 적재함에서 라면 박스 정도 크기의 택배 한 개를 꺼내 할머니 댁 마루에 놓으며 물었더니 “사람이 온다 그라문 기달리고 있어야제 으디 나가불문 쓰간디!” “인천의 김기수 씨가 누구 되세요?” “김기수? 우리 외손지여! 딸이 뭣을 사서 보냈다고 전화 했드만 박스가 큰 것 본께 선물을 많이도 사서 보냈는 갑네!”


“할머니 주민등록증을 좀 보여주시겠어요? 여기 현금이 10만원 왔거든요.” “이것은 우리 아들이 내 용돈하라고 보낸 것이구만!” “혹시 할머니 생신인가요? 이렇게 선물도 오고 용돈 오는 것을 보면.”하고 물었더니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짓던 할머니께서 “생일? 생일은 무슨 생일! 그냥 애기들이 보낸 것이제! 내가 안 죽고 오래 살고 있응께 이라고 호강할 때도 있구나!”하며 이내 쓸쓸한 표정을 지으신다. “어르신이 일찍 돌아가셨나요?” “우리 영감? 일찍 죽었제~에! 6,25때 죽었응께!”


“그랬어요?” “내가 열일곱 살 때 우리 영감에게 시집왔어! 그라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논도 쪼금 사고 살만하다 그랬는디 을마 안돼 6,25가 터졌어!”하며 손가락으로 마을 아래쪽 집을 가리키며 “저 아랫집 작은 아부지가 우리 동네 빨갱이 대장이었어! 그란디 어느 날 면(面)소재지에서 인민군 대장이 동네 젊은 사람 몇 명 데려오라 한다고 우리 영감한테 율포(栗浦)를 가자 그러데!” “그래서 따라 가셨나요?” “아니여! 우리 영감은 안 갈라고 그랬는디 자꾸 가자 그래싼께 할 수없이 끌려 나갔제!


그때는 맘에 안 들문 잡아다 총으로 쏘아 죽이고 대창(竹槍) 같은 것으로 찔러죽이던 때라 한번 가자고 하문 따라가야제 안 따라가면 안 되야! 그란디 지금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저기 연동(蓮洞) 선창에서 손바닥만한 나룻배에 쌀을 다섯 가마니나 싣고 젊은 사람 다섯 명이 같이 타고 노를 저어 율포로 가다 배가 뒤집어져 바다에 빠져 죽고 말었어!” “그런 일이 있었군요.” “지금 생각해 봐도 금방까지 살아있든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그랑께 을마나 기가 맥히든지 참! 말도 안 나와불데!”하시는


할머니의 얼굴은 무척 공허한 표정이었다. “그러면 지금도 저쪽 집하고는 사이가 좋지 않겠네요?” “사이가 좋으면 뭐하고 나쁘면 뭐해! 이미 그때 그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는데 남은 사람들이라도 서로 돕고 사이좋게 살아야제!”할머니를 뒤로하고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다음마을을 향하여 천천히 달려가는데 자꾸 내 귓가에는 할머니의 말씀이 메아리쳐 들려오고 있었다. “사이가 좋으면 뭐하고 나쁘면 뭐해! 이미 그때 그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는데 남은 사람들이라도 서로 돕고 사이좋게 살아야제!”


 *할아버지께서 끌려 가셨던 연동 선창에는 주인없는 빈 배 만 파도에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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