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자전거

"억울해 죽것네!"

큰가방 2008. 8. 31. 17:18

“억울해 죽것네!”


오늘도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시골마을에 우편물을 배달하러 가는 길. 가을로 들어선다는 입추(立秋)가 며칠이 지났으나 무더운 날씨는 계속되고 있는데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어느새 가을이 다가왔음을 말해주고 시골마을 입구의 넓은 공터에는 언제 밭에서 베어다 세워놓았는지 길게 늘어선 참깨 대들이 따가운 햇살아래 서로 어깨를 마주대고 가을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으며. 지난 봄. 감자를 캐내고 묵혀두었던 밭에는 금년 김장철에 판매할 쪽파 씨를 파종하기 위하여 유기질 퇴비를 뿌린 다음


커다란 트랙터가 힘찬 굉음을 내며 로터리를 치고 있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하얀 옷을 입은 백로(白鷺) 십여 마리가 트랙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흙에서 나온 벌레잡이에 한창이었다. 내가 전남 보성 회천면 화죽리 화당마을 우편물 배달을 거의 끝내고 마을 가운데 길을 지나 도로 쪽으로 빠져나가려는데 담장 밑 그늘에서 마을 영감님 내외분이 다정하게 앉아 쪽파 종자를 손질하고 계셨다. “어르신! 수고가 많으시네요!” “응! 오늘은 뭣을 갖고 왔는가?” “전화요금이 나왔네요!”


“아니! 이 사람이! 반가운 것 좀 갖다 주랑께!” “반가운 것은 다음에 갖다 드릴게요! 그럼 수고하세요!”하였는데 “어이! 자네! 내가 뭣을 잔 물어봐야 쓰것네!”하고 부르셨다. “무엇을 물어보시게요?” “오토바이 시동 꺼야제! 요새 지름값도 비싼디 그라고 놔두문 쓰것는가?” “참! 내 정신 좀 봐!”하며 오토바이 시동을 끈 다음 “어르신! 무엇을 물어보려고 그러세요?” “자네는 동네 마다 댕겨본께 잘 알것제? 그란디 남자들이 이라고 쪽파 씨 손질하고 있는 사람 있든가?”하고 물었다.


“예~에? 쪽파 씨 손질하는 사람이요? 보긴 봤는데 왜 그러세요?” “그라문 누가 손질하고 있든가?” “저기 객산마을 선씨 영감님!” “선씨 영감! 응! 그 영감은 손질하고도 남을 사람이여! 워낙 여자 같은 성질이어서 우리하고도 잘 안 맞응께!” “그리고 화곡마을 임씨 영감님도 계시고!” “임씨 영감! 아이고! 그 사람은 일 그만해도 넉넉하니 묵고 살만한 사람인디 그라고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일만 해싸! 즈그 아들이 싫어라고 해도 소용이 읍드만! 그라고 또 누가 있든가?”


“갈마마을 박씨 영감님도 손질을 잘하시던데요!” “갈마 박씨 영감! 그 사람은 부인도 없이 혼자 사는 사람잉께 누가 도와줄 사람도 읍는디 쪽파를 심을라문 지가 다 해야제! 으짜것인가? 자네 말이 거짓말은 아니구만! 그란디 이쪽 화죽리 쪽에는 누가 있든가?” “화죽리 쪽에요? 글쎄요? 화죽리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요!”하였더니 할머니를 힐긋 쳐다본 영감님 “보소! 화죽리서는 암도 일을 안 한다고 한가? 그란디 나를 이라고 날마다 일을 부려먹어?”하셨다.


“어르신! 그래도 나중에 쪽파 팔면 돈은 어르신이 챙기실 것 아닙니까?” “도~온! 나~아! 돈도 별로 필요가 없는 사람이여! 인자 자식들 다 갈치고 결혼시켜서 즈그들 살만큼 살고 있는디 뭔 돈이 을마나 필요하것는가? 내가 젊었을 때 같으문 친구들하고 술도 마시고”하며 살짝 할머니 눈치를 살피더니 “각시 집에도 댕기고 했는디 인자 내 나이 칠십 살이 넘었는디 술을 마시껏인가? 각시 집을 댕길 것인가? 그란디 자네도 봤응께 알제만 벌써 삼 일째 우리 집 할멈은 나를 이라고 부려 묵고 있응께 억울해 죽것네!”하셨다.


“그래도 두 분 나란히 앉아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데요!” “좋기는 뭣이 좋아! 좋은 것도 젊었을 때 말이제 인자 나이 묵었는디 조으문 을마나 조으껏인가?” “그래도 지금 부지런히 일하시고 나중에 쪽파 판 돈으로 할머니와 손잡고 여행이라도 다녀오시면 좋지 않겠어요?”하였더니 “여보! 우리보고 손잡고 여행다녀오라고 그란디 갖다오까?”하시자 지금까지 아무 대꾸도 없던 할머니. 가만히 고개를 들고 빙긋이 웃으며“갖다오문 조채 으째요?”


 *커다란 트랙터 뒤의 먹이 찾는 백로들이 무척 바쁘게 보였습니다.

 *돈도 별로 필요가 없는디 자꾸 일 만 시키니 억울해 죽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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