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

이화원에서

큰가방 2005. 6. 8. 23:54
 

이화원에서


신종황제의 능을 돌아본 우리 일행은 다시 이화원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화원은 경치가 빼어나고 수려하여 황실의 정원으로 사용하다가 전쟁으로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그후 서태후가 다시 재건하여 여름이면 북경에서 이곳까지 내려와 정사를 돌보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동차가 없던 그 시절 북경에서 이화원까지 말로 달려도 약 4시간이 걸렸던 거리를 가마를 타고 이화원까지 걸어왔으니 며칠을 길에서 허비한 셈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무신(武臣)들은 말을 타고 오기 때문에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문신(文臣)들은 가마를 이용하여 북경에서 이화원까지 오가야 했기 때문에 해마다 여름이면 아예 북경을 비워두고 이화원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하니 국력의 낭비가 얼마나 심하였지 알 수 있는 있는 대목입니다. 서태후는 너무나 많은 사치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나중에 돈이 없자 국방 예산까지 가져다 탕진하였는데 그 바람에 결국은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화원의 넓이는 290만 평방미터라고 합니다. 제가 둘러본 이화원은 빼어난 경치도 경치려니와 넓은 호수에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보기 좋게 배열되어 있어서 옛 중국 황실의 권세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듯 했습니다. 조학봉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호수의 한 가운데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를 키우는 동물 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태후가 남자 생각이 나면 시종들은 북경에서 미남들을 뽑아 서태후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태후에게 바쳐진 남자들은 이화원을 들어가는 것은 보아도 나오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서태후에게 한번 바쳐진 남자는 서태후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목을 쳐 맹수 우리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경에는 미남이 없다!” 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고 합니다. 서태후는 나라를 망쳐먹은 여후로 기록이 되었으나 난(蘭)을 특히 좋아해서 난 귀인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화원의 구경을 마치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던 버스로 돌아오는 길에 “로렉스 시계! 로렉스 시계!”를 외치는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로렉스 시계가 얼마인가?” 하고 물었더니 처음에는 “한 개에 이십 만원!” 하더니 차츰 가격이 내려가기 시작하다가


나중에 저의 일행이 승차한 버스가 출발하기 전에는 “로렉스 시계 한 개 만원!”하더군요! “아니! 로렉스 시계 한 개에 만원이라고? 그럼 저 시계 몽땅 사가지고 한국에 가서 되팔면 부자 되겠다!”고 제가 농담을 하였더니 저의 일행 모두가 한바탕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저의 실수로 이화원을 촬영하였던 사진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중국 베이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살던 고향은  (0) 2005.06.10
평양냉면  (0) 2005.06.09
신종황제의 능  (0) 2005.06.07
황제의 능을 발굴하다!  (0) 2005.06.06
명 13능(明 13陵)  (0) 2005.06.05